물론 진짜 멋으로 있으면 안 됩니다
나는 '업무분장'이란 말을 회사 들어와서 처음 들었다. 그전까지는 아마 오피스 드라마에서나 좀 봤겠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겠지. 신입 때는 '서무' 등의 업무가 빼곡히 적혀 있는 업무분장표 속 내 이름을 보며 별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나는 스스로 뭔가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누가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누가 ㅇㅇ씨, 하고 부르면 네! 하고 달려가 뭔가를 하기만 하면 되는 '신입이'였다.
'공공기관에서 업무분장은 멋있으라고 있는 것'이라고 제목을 지었지만, 정말 신비롭게도 내가 신입 때 처음 배치받았던 팀은 업무분장을 꽤나 잘 지키는 팀이었다(첫 팀이었기에 그때는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몰랐다). 내가 팀에 배치받자 선임인 선배가 내 이름까지 포함된 '업무분장표'를 새로 만들었고, 팀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업무분장표'는 팀의 업무를 나타내는 팀 업무분장표가 아닌, 팀 안에서 개개인의 업무를 나누는 팀 내 업무분장표를 가리킨다. 보통 표 형태로 만들며 팀원들의 이름이 죽 쓰여 있고 옆에는 각자가 맡은 업무를 죽 나열해놓는 식이다. 정부가 나뉘어 있는 경우 정, 부도 명확히 표시해 둔다.
첫 팀에서 나는 '서무'와 같은 막내 업무도 받았지만, 나름 단위 업무도 몇 개 부여받았다. 당시에는 온전히 내 업무를 받는다는 게 부담되기도 했고 기본계획부터 쓰느라 쩔쩔매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신입인 나한테도 '이것저것 선배들 일 뒤치다꺼리'가 아닌 명확한 업무를 주려 했던 선배님들의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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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과도 같이 '업무분장'대로 돌아가던 팀에서 벗어난 뒤, 나는 드디어 '공공기관에서 업무분장은 그냥 있는 거고 의미 없는 거구나!'를 깨달았다. 그다음 언젠가의 팀에 가고 나는 몇 개월 동안 내 이름이 적힌 업무분장표를 받지 못했다. 그냥 팀장님이 시키는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명확한 업무분장이 없는 것이 정말 괴로운 일임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고, 무슨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지도 알지 못했다. 회사 게시판에 공지가 올라오면 강박처럼 확인했고 때로는 다른 선후배와 동시에 같은 일을 하다가 나중에야 알아채서 시간을 버리기도 했다. 요구자료가 오면 '각자 업무분장에 해당하는 내용 써서 주세요' 하고 취합자가 착착 취합해 제출했던 신입 때가 간절히 그리웠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이번 팀이 이상한 거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또다른 팀으로 옮기기를 희망했다.
여러 팀과 여러 팀원을 거친 지금, 나는 첫 팀이 기이할 정도로 업무분장이 잘 되어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업무분장 없이 우당탕탕 굴러가다 어딘가에서 팀 내 업무분장표를 내라고 하면 그제야 그 날짜로 업무분장표를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몇 년 동안 내 업무의 범위를 모른 채로, 일이 생기면 달려들어 내 일이 아닌 일까지 끙끙 짊어진 삶을 살았다. 내 일도 내 일, 네 일도 내 일. 그렇게 살다 보니 화가 많아지고 사람이 싫어졌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은 시점이 왔다. 회사를 바꾸든 나를 바꾸든, 둘 중의 하나는 해야 했다.
의외로 해결책은 간단했다. '알아서 척척' 안 하면 되는 것이었다. 팀이 바뀌고 팀원이 바뀔 때마다, 나는 꼼꼼히 업무분장을 해달라고 리더에게 요구하려 노력한다. 이 일은 제 일인가요? 그러면 저 일은 제가 하면 되는 거죠? 이 일은 누가 하는 건가요? 열심히 물어보고 정의한다. 공공기관은 특성상 외부(국회 등) 요청자료도 많고 갑자기 생기는 일도 많으므로 정말 세세하게 업무분장을 해둬야 갑작스러운 일이 터졌을 때도 당황하지 않고 이 일이 누구 일인지를 배정할 수 있다. 팀 내 업무분장이 잘 되면, 그에 맞게 열심히 내 업무분장대로 일한다.
중요한 건 팀 내 업무분장이 잘 되지 않을 때의 대응방식이다. 가끔 업무분장하는 것을 싫어하는 리더를 만날 수도 있다(사실 자주 있는 일이다). 업무분장을 명확히 하지 않아야 일이 생겼을 때 대충 아무한테나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나는 애매한 일(업무분장이 명확하지 않아 누가 해야 할지 모르겠는 일)은 절대 절대 알아서 먼저 나서서 하지 않는다(않으려 노력한다^^;;). 요청자료가 떨어지고 기일이 다가오면 누군가는 해야 할 것 같아 나 같은 겁쟁이는 한없이 무섭지만, 그 찜찜한 기분을 꾹 참고 하지 않는다. 알아서 하면 그건 내 일이 되고, 왠지 모르게 내 책임이 되기 때문이다.
업무분장을 명확히 해서 열심히 하도록 하되, 그게 안 될 경우 업무분장에 글자로 쓰여 있는 일만 하는 것. 그래야 나 스스로를 지킬 수 있고, 일을 하면서 억울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나도 여전히 그렇게 실천하는 게 쉽지 않고, 많은 경우 투덜투덜하며 업무분장에도 없는 일을 꾸역꾸역 하고 있지만^^; 오늘도 다시 한 번 업무분장대로 일해 보자고 여기에라도 선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