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안한 제이드 Nov 01. 2022

공공기관의 문서에는 왜 '※'이 많을까?

이 일을 할 것이지만 안 할지도 모른다?




  공공기관에서 만든 문서나 공지글을 보면 유독 '※'이 많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가 많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안 가는가?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ㅇㅇ시 한마음 체육대회 행사 추진계획>


ㅇ 일시 : △△월 △△일 △△시~△△시

    ※ 날씨 등 사항에 따라 일정 연기될 수 있음

ㅇ 참석자 : △△△ 外 9명(총 10명)

    ※ 참석자 명단 별첨

    ※ 참석자는 상황에 따라 변동될 수 있음

ㅇ 상품 : 아이패드10 3대

    ※ 별도 예산으로 구매

    ※ 상품 세부사항은 추후 변경될 수 있음

ㅇ 예산 : 200,000원

   - 행사 후 간담회 진행 : 20,000원*10명 = 200,000원

     ※ 행사 진행에 따라 예산 변동 가능



  실감 나게 하기 위해 실제 상황에서 약간의 과장을 더했지만, 현실에서도 문서의 구성은 크게 다르지 않다. 품의서 한 줄마다 잠깐! 하고 '※'가 한두 개씩 더덕더덕 붙어 있는 식이다. 과도한 '참고사항'으로 인해 문서는 말 그대로 지저분해진다. 깔끔함이 생명인 공공기관 문서에 참 들어맞지 않는 구도인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계획과 달리 실제 상황에서는 다양한 변수가 생기고 그에 따라 많은 것들이 변동되는데, 바뀔 수 있음을 미리 참고사항으로 달아놓지 않으면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경우 많은 사람들에게(감사팀에게, 윗사람에게 등등) 혼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 이렇게 할 거라고 말했지만 사실 이렇게 안 할지도 모른다? 나 이걸 한다고 해놨지만 사실 못할지도 모른다?'와 같은 괴상한 문서를 작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 △△시부터 행사를 시작한다고 썼지만 혹시나 그날 비가 와서 행사가 다음날로 미뤄질 수도 있으니 연기될 수도 있다고 써놓아야 하고, 참석자가 총 10명이라고 썼지만 갑자기 한 명이 휴가를 내서 9명만 참석할 수도 있으니 참석자가 바뀔 수도 있음을 꼭 적어두어야 한다. 상품은 말할 것도 없다. 아이패드10을 준다고 했지만 갑자기 아이패드가 품절되어 갤럭시탭을 사야 할 수도 있으니 상품이 변경될 수도 있다고 써야 한다. 이런 내용을 안 써놓으면 나중에 없는 아이패드를 찾아 전국을 헤매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Photo by Elisa Ventur on Unsplash



  약간 다른 경우지만, 이럴 때도 있다. 나는 업무를 할 때 나 스스로를 위해 매뉴얼을 만들어가면서 하는 타입이다. 아주아주 간단한 지출 업무라도 a부터 z까지 아주 세세하게 적어 놓고 주의사항들도 잔뜩 적어놓아야 나중에 마음 편하게 매뉴얼대로만 일하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매뉴얼을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공유할 때 일어난다. 'ㅇㅇ씨, 이거 ㅇㅇ씨가 준 매뉴얼대로만 하면 되는 거지? 나중에 잘못되면 ㅇㅇ씨 책임이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감동실화). 그러니 내가 쓴 모든 매뉴얼(다른 사람 주는 버전)에는 이런 말들이 붙게 된다. 



ㅇ지출 매뉴얼 

  - 1. 지출 카드를 선택한다.

  - 2. 지출 등록 버튼을 누른다. 

  - 3. 지출 버튼을 눌러 지출 처리를 진행한다. 

  ※ 지출 과정은 회계팀 공지가 바뀔 때마다 그에 맞게 수정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매뉴얼대로 하기 전에

      회계팀 확인을 반드시 거치시기 바랍니다. 



  결국 모든 것은 '문서와 현실이 정확히 일치하지 아니할 때 누가 책임지는가'의 문제이다. 문서를 쓰는 사람은 문서를 쓰는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이니, 그게 현실에서 그대로 일어나지 않을 경우 책임까지 지기는 싫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문서가 지저분해지는 걸 알면서도 덕지덕지 '※'를 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정말정말정말 스마트한 사람은 모든 변수를 예측해서 그걸 본문에 넣고 '※'를 없애 깔끔한 문서를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같은 평범한 공공기관 근무자는 오늘도 본문을 일필휘지로 써 놓고는, 문서 처음으로 되돌아가 현실에서 0.001mm의 오차라도 벌어질 것 같은 부분이 보이면 '※' 붙이기를 시작한다. 일하다 보면 어쩔 수가 없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