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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안한 삶 Sep 05. 2023

남편이 파키스탄으로 발령 나다

남편은 원래 파키스탄에 갈 생각이 없었다. 내가 먼저 가자고 했다.

  남편이 파키스탄에 지원한 주된 이유는 아이들의 영어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한국엄마들이 그렇듯이 나는 그 당시 아이들 영어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교 1학년, 3학년이었고 다른 과목은 그다지 많은 학습량이 필요한 시기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외국어를 배우기에 딱 좋은 나이였다. 외국어는 10세 이전에 배워야 원어민처럼 구사할 수 있다는 이론도 있는 데다가 대부분의 한국아이들이 그렇듯이 우리 아이들도 한글은 학교 입학 전에 뗐기 때문에 영어를 이때 배운다면 두 가지 언어를 모두 잘하게 되어 아이들의 인생에 평생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아이들의 교육 테크트리를 초등 때는 여유롭게 놀면서 영어 완성과 독서 습관 기르기, 중등 때 수학에 좀 더 할애하면서 본격적으로 공부에 돌입, 고등 때 피치를 올리며 마무리 정도로 잡았었다.  이건 예전에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본 나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친한 사촌언니의 남편인 형부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는데, 다른 나라 주재원으로 발령 나서 언니의 아이들이 국제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 아이들도 우리 아이와 비슷한 또래였다. 그 당시 나는 언니가 무척 부러웠다. 


  언어는 단기간에 완성되지 않는다. 절박하든지 언어를 아주 좋아하든지.. 둘 중 하나여야 완성된다. 그런 측면에서 단기간의 영어캠프처럼 한 달 살기는 동기부여만 될 뿐, 언어습득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았다. 절박한 환경에 밀어 넣어야지만 완성된다. 나는 해외에서 아이들이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남편에게 해외근무를 제안했고, 남편은 처음에는 해외근무에 대한 생각이 없다가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남편은 파키스탄에 지원했고, 그 당시 경쟁이 있었음에도 오게 되었다.






  남편과 나는 2020년 9월 동시에 승진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남편은 2020년 12월 파키스탄으로 발령 났다. 다만, 3개월 동안 본사에 근무하고 나서 파키스탄으로 가게 되어 실제로는 2021년 3월에 남편은 파키스탄으로 갔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남편과 같이 가고 싶었다. 나의 휴직기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효율적으로 되도록이면 3월에 같이 가고 싶었다. 하지만 코로나라는 복병이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가족들은 몇 개월 후에나 파키스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코로나 때문에 국제학교에서 온라인 수업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공기업은 학비 지원이 별로 되지 않아 국제학교 학비의 대부분을 자부담으로 해야 했다. 그래서 학기 중간에 들어가서 온라인으로 수업하는데 학비를 한 학기 전부 지불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비싸게 느껴졌다. 이런 이유로 남편이 3월에 먼저 들어가고 우리는 다음학기 시작인 8월에 파키스탄으로 가게 되었다.


 보통 주재원 아내들은 파키스탄 같은, 위험국가인 데다가 우리나라보다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운 나라에 가는 것을 꺼려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내가 먼저 남편에게 가자고 한 예외적인 케이스였다. 나는 예전에 다른 나라에 *여행을 많이 다녔었고, 실제로 살아가는 것도 그렇게 힘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이때까지만 해도..)


  그리고 나는 집순이기 때문에 파키스탄에서도 집 밖에 거의 나갈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행복하게 이불속에 파묻혀 있을 것을 상상했다. 어차피 집 밖에 거의 나가지 않는다면, 집 바깥 환경은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오판이었다는 것을 나는 아이들을 국제학교에 보내고 난 후 깨달았다. 집 밖에 나갈 일(모임)이 아주 아주 아주 많았다.)


  그리고 아이들도 영어를 배우지만 어른인 남편과 나도 영어를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학창 시절부터 영어가 복병이라고 생각했다. 수능 모의고사를 볼 때에도 나와 비슷한 성적에 있는 아이들은 외국어영역(영어)에서 모두 만점을 받았지만, 나는 하나씩 틀리고는 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했고 싫어했다. 

  그 후, 대학교에 진학했는데 재외국민인 아이들이 많았고 그 아이들은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했었다. 굳이 재외국민이 아니더라도 영어를 잘하는 아이들이 많았고, 대학 친구들 중에는 카투사로 군대를 갔다 온 아이들이 많았다. 

  게다가, 대학 교재 자체가 다 원서였고 교수님들 중에서는 영어로 수업하시는 분들도 많으셨다. 영어를 잘하는 아이들에게 유리한 환경이었다. 영어를 잘하는 아이들이 많았기에 우리 학교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영어를 잘할 것으로 기대했었고, 나는 부담스러웠다. 

  더욱이 공기업에 입사 후, 영어를 쓸 일도 없어서 그나마 하던 영어도 많이 까먹었었다. 나는 원래 극내향적인 성격인 데다가 다른 한국인들처럼 영어 스피킹을 할 때 실수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고질적인 한국인의 영어 스피킹 부족을 나는 깨부수고 싶었다.  파키스탄에 와서 영어 스피킹을 잘하는 것, 이것도 나에게는 하나의 새로운 도전이었다.(지금은 외국인 친구들을 많이 사귀면서 스피킹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외국인 학부모와 만나 몇 시간 동안 수다를 떨고 가족끼리 해외여행도 같이 다녔다. 마음이 잘 맞는 외국인 베스트프렌드도 생겼다. 그래서 어느 정도 성취했다고 볼 수 있다.)




 


  2021년 3월 어느 날, 남편이 드디어 파키스탄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남편과 이때까지 오래 떨어져 본 경험이 없었기에, 남편이 영영히 돌아오지 않는 나라로 떠나는 것만 같았다.

  우리 집은 공항에서 차로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기에, 내가 차를 운전해서 남편을 공항으로 데려다줬다. 아이들과 나는 남편을 배웅하며 막 울었다. 영영히 못 볼 것처럼...


  남편이 없는 날은 더디 흘러갔다.

  생각보다 남편과는 통화가 힘들었다. 4시간 시차 때문에 애매했다. 파키스탄이 4시간 우리나라보다 느린데, 내가 전화하려고 하면 남편이 근무시간이었고, 남편이 근무를 마치면 내가 애들을 재울 시간이었다.ㅠㅠ

  나는 남편 없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학원에 차로 픽업하고.. 가사와 육아를 홀로 담당했다.

  그리고 국제학교 입학을 위해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에 가서 서류를 떼온 후 영문으로 번역하고 공증을 받아야 하는 절차가 있었다. 이 서류 때문에 인천시청 근처를 아이들을 데리고 몇 번 방문했었다.

  살고 있는 집을 세 놓는 것도 모두 내 몫이었다. 특히 그 당시 주변 아파트와 입주장이 겹쳐 월세가 잘 안 빠져 집 보여준다고 힘들었다.ㅠㅠ 20번 넘게 보여준 것 같다. ㅠㅠ 그래도 다행히 내가 파키스탄 가기 전에 우리 집의 세가 맞춰졌다.





  드디어 시간이 흘러 8월이 되었다. 남편이 우리를 데리고 파키스탄으로 가기 위해서 한국에 휴가 왔다. 그 당시 코로나가 유행했기 때문에, 남편은 자가격리를 집 근처 오피스텔에서 했었다. 그때 나는 남편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사서 자가격리하는 오피스텔 문 앞에 가져다 놓곤 했었다.

남편이 받은 자가격리 생활수칙, 통지서, 자가격리물품


  남편은 자가격리하면서 필요한 아이들 옷, 음식소스 등을 인터넷으로 구입했다. 특히 된장과 고추장은 필수품이라고 했다. 소면을 구입하길래 내가 이거 왜 사냐고 했었는데, 남편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국수는 면을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파키스탄에서는 구할 수가 없는, 정말 요긴한 음식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파키스탄에서 소면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몰랐었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남편의 자가격리가 풀리고 우리는 이사 전날에 차를 팔았다. 산 지 3년밖에 되지 않은 거의 새 차였는데, 게다가 연료비를 생각해서 하이브리드로 산 차여서 좀 아쉽긴 했다. 그렇지만 차는 감가상각이 심하기 때문에 파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차를 팔게 되었다.

차량 판매 문자

   친정 엄마가 이사를 도와주고 배웅해 주기 위해 멀리서 오셨다. 우리는 이삿짐을 해외이사 컨테이너에 싣었다. 이삿짐센터 사람이 이때까지 주재원으로 가는 사람 중에서 짐이 제일 많다고 했다. 싣고 싶었던 실내자전거도 못 싣고 버렸는데ㅠㅠ 컨테이너가 너무 작았다.ㅋ



 우리 가족은 파키스탄 갈 때 이민가방 4개와 큰 캐리어 4개, 작은 캐리어 4개를 가져갔다.

 나는 파키스탄에 가면 화장품을 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쓰고 있던 화장품 브랜드를 방판으로 몇 박스 구입했다. 샘플도 많이 딸려왔다. 남편이 화장품을 왜 이렇게 많이 갖고 가냐고 뭐라고 했다. 하지만, 많이 가져가길 잘했다. 파키스탄에서는 한국 화장품을 구할 수가 없었다.


 우리 가족은 이삿짐을 다 보내고 난 후 그날 오후에 공항으로, 파키스탄으로 출발했다.





*이때까지 내가 여행 갔던 나라 :  캐나다 서부, 동부(2000년), 터키 이스탄불, 지방(2002년), 일본 도쿄, 오사카(2007년), 나가사키(2008년), 러시아 모스크바, 상페테르부르크(2009년), 미국 하와이(신혼여행, 2009년), 태국 방콕, 파타야(2010년), 이탈리아 로마, 프랑스 파리(2013년), 필리핀 보라카이(2018년), 미국 괌(2019, 2020년), 필리핀 세부(2019년), 아랍에미리에이트 두바이(2022년, 2023년), 싱가포르(2022년), 독일 베를린, 영국 런던(202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터키 이스탄불(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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