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이 아니라 섬김을 실천하고 간 선교사 이야기
좋은 아침이에요. 여러분.
다들 아침 출근 준비는 잘 하고 계신가요?
오늘은 4월 26일에 개봉한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를 소개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서서평이라는 인물의 일대기가 곧 영화의 줄거리인 다큐 영화인만큼 오늘은 서서평의 삶 전체에 대한 이야기와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에 관련된 정보를 나누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 서서평의 삶
서서평 선교사의 본명은 엘리자베스 쉐핑으로 독일 출신의 미국인입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인 1912년에 32살의 나이에 당시 조선을 방문한 그녀는 한국 최초의 간호선교사였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에는 이렇다할 보건의료시설이 없었고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주력할 뿐 조선인들의 삶을 개선하는데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때 서서평은 전라남도 광주 제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아픈 조선인들을 돌보면서 가난한 조선여인들의 교육을 담당하였습니다.
서서평은 입양한 딸 13명과 나병에 걸린 아들 1명 등 14명의 조선 아이들을 자식으로 키워냈었습니다. 단순히 입양시킨 것을 넘어 서서평은 아이들이 좋은 집안과 결혼하고, 스스로 독립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서서평은 평생 모은 돈으로 한국 최초의 여자 신학교인 광주 이일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이일학교는 1961년 전주로 이전해 현재의 한일장신대가 되었습니다. 이일학교는 서서평의 친구 선교사인 로이스 니일(Lois Neel)의 후원을 얻어 만들어진 학교로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학교입니다.
이에 더해 서서평은 조선간호부협회(오늘날의 대한간호협회)를 만들어 조선 내 의료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서서평은 자신이 세운 조선간호부협회를 세계간호협회에 가입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 때 미국에서 어머니를 만났지만 자식의 몰골에 외면하고 말았다 합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국제간호협회 가입 역시 일본의 방해로 무산되었습니다.
서서평은 간호사일과 함께 조선의 부인들을 모아 지금의 오웬 기념관 건물에서 선교공부 및 초등학교 교육 과정도 진행하였습니다. 광주 전역에서 200명이 넘는 부인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의 여성들은 이름을 가진 사람도 몇 명 없었고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 때문에 남편에게 노예처럼 복종해야하고 남편이 외도를 하여도 한 마디 항변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서서평은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가르쳐주었고 이 과정을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933년에 서서평은 조선인 신도들과 함께 50명의 나병환자를 이끄고 당시 한양으로 행진하여 일제에 나병환자들의 쉼터를 요구하였습니다. 서서평의 이러한 행동을 전국에 있던 나병환자들이 알게 되자 모두 그녀를 따라 조선총독부로 모여들었고 결국 총독부는 서서평에게 나병환자를 위한 요양시설과 병원건립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렇게 건설된 것이 소록도에 있는 한센병환자 병원입니다. 서서평은 광주를 중심으로 전라도 전역과 제주도까지 순회하며 환자를 돌보고 선교활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서서평은 평생 검소하게 살다가 1934년 6월에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망 당시 그녀에게는 거의 남은 재산이 없었다고 합니다. (덮고 있던 담요와 일주일 일삯에 해당하는 돈 7전, 강냉이 가루 두 0.4L가 전부였다고 합니다.) 조선에 온지 20년, 그렇게 삶을 마쳤습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을 세브란스 의대에 기증하며 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써줄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서평은 자신의 간호를 맡았던 브랜드 선교사에게 '나를 치료하는 일로 조선인 환자들을 소홀히 하지 말아주세요'라고 얘기하며 자신이 돌보던 가난한 과부 35명을 돌봐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서서평의 장례식은 광주시민사회장으로 10일동안 치뤄졌다고 합니다. 현재 그녀의 묘는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있습니다. 서서평의 장례 때 그녀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서 장례식 비용을 마련하였고 그렇게 현재 그녀의 묘비가 마련되었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장례식이 마치 개선행진 같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현재 그녀의 묘역에는 호남신학대학교가 세워져있고 본관 옆 언덕에 그녀의 묘가 비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서서평은 1912년 조선에 들어온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 광주 양림동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보리밥에 된장국을 즐겨 먹으며 조선인들과 똑같이 생활하였습니다. 당시 선교사는 생활비로 3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서서평은 자신의 수입의 1/30인 10전밖에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시대상에 따르면 적지않은 선교인들이 본인의 사명 대신 부호의 위치에서 조선인을 하인으로 두고 좋은 저택에서 귀족처럼 생활하였으며, 일찍 서양문물을 교육받은 여성들은 개인의 부귀권세만을 취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 서서평의 삶은 상당한 귀감과 반성을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2. 서서평의 과거, 엘리자베스 쉐핑의 삶
서서평은 1990년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는 1살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미국으로 떠나버려서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할머니 덕분에 서서평은 가톨릭 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지만 그녀가 9살의 나이가 되자 할머니는 사망합니다.
할머니의 사망 이후 서서평은 미국의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뉴욕의 고등학교를 다닌 후, 간호학교에서 공부하였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부터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에 관심을 가졌던 서서평은 간호사 겸 선교사로 활동하며 봉사를 하였습니다. 이 때 서서평이 가톨릭이 아닌 기독교로 개종하자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는 그녀와 의절을 선언하였습니다.
이후 그녀는 조선에 경력있는 간호사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장로회의 요청을 받게 되고 그렇게 조선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한국어를 배우고 이름도 서서평으로 바꾸고 전라도에서 간호사 양성과 선교활동에 힘쓰게 됩니다.
처음에 그녀는 광주 지역 외에도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에서도 근무하였지만 3.1운동 이후 일제는 서울 활동을 금지시켰습니다. 이후 그녀는 방문 간호와 공중위생, 인신매매 근절과 문맹퇴치운동, 공창폐지 운동에도 앞장섰습니다.
서서평이 나병 환자를 돌볼 때 말못할 고생을 많이 하였는데, 그중 가장 큰 문제는 나병환자에 대한 조선인들의 따돌림과 멸시였습니다. 나병이 전염병이라고는 하지만 조선인들의 환자에 대한 괄시는 그 이상이었고 그 때문에 나병 환자 시설을 만들려 하여도 주민들의 반발로 시외에 옮겨다니며 세워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나병환자 시설이 소록도의 병원입니다.
광주에 거주하는 동안 그녀는 호남 지역에 4,000그루의 뽕나무를 심어 양잠사업을 하여 교육활동에 사용했다고 합니다.
3. 영화 관련 이야기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는 온누리선교재단에서 그녀를 기리기 위해 제작하였고 배우 하정우가 나래이션을 외국인 배우인 윤안나가 서서평 역을 역시 같은 외국인 아역 배우인 안은새가 서서평의 아역을 맡았습니다. 하정우는 작품의 선한 취지에 반해 이 작품에 재능기부로 목소리 출연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주연인 윤안나(본명 : 안나 리홀만)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윤안나는 독일 출신 배우로 2014년에 한국에 들어와 배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김기덕 감독의 '빈집'을 본 후 한국에서 배우 활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본래 독일의 튀빙겐대학교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3학기만 이수하고 2014년부터 한국에 정착하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기과를 전공하고 대학로 연극무대 등을 통해 실력을 쌓았습니다. 독일어를 비롯해 영어, 불어, 라틴어 한국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하며 외국인 배우의 한계를 깨기 위해 직접 시나리오를 쓰며 영화제작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네요. 쌍문동의 가정집에서 홈스테이를 하고 있는데 집주인의 성을 따서 '윤안나'라는 예명을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 서서평의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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