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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 May 15. 2017

영화 네루다

시인이자 외교관, 혁명가였던 사나이의 삶의 흔적

굿모닝입니다. 여러분.
다들 아침 식사 맛있게 하셨나요?


오늘은 5월 25일 개봉 예정인 영화 <네루다>를 소개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 영화는 20세기 최고의 시인 중 하나로 꼽히는 파블로 네루다의 가장 긴박하고 힘들었던 시기의 삶을 다루고 있는데요. 정부의 박해를 받아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네루다와 그를 체포하기 위해 정부에서 파견한 첩보원 오스카의 쫓고 쫓기는 스토리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파블로 네루다의 삶과 영화 <네루다>에 관한 정보, 그리고 파블로 네루다와 관련된 숨겨진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 파블로 네루다

칠레의 시인이자 공산주의 정치가로 유명한 파블로 네루다의 본명은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예스 바소알토입니다. 살아 생전 연애시를 많이 남겼으며 그 외에도 다양한 스타일로 시를 썼습니다. 그는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고국인 칠레를 떠나 정치적 망명을 여러군데 다녔고 1971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파블러 네루다는 2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철도 노동자인 아버지와 홀로 살았습니다. 네루다는 13살 때 신문에 그의 첫 시를 발표하였지만 아버지가 아들이 시인이 되는 것을 극렬히 반대하여서 더 이상 공개적으로 글을 쓰기 힘든 상황에 처했습니다. 때문에 그는 그 때부터 본명 대신 파블로 네루다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얀 네루다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이 필명은 그가 존경하던 얀 네루다의 성과 사도 바울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는데 유명해진 후 아예 정식 이름으로 개명하였습니다. 이후 칠레의 유명 여성시인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을 만나 문학적 소양을 기른 후 본격적으로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합니다.

1921년 19살의 나이로 <축제의 노래>라는 작품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황혼의 노래>, <스무 편의 사랑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지상의 거주지> 등 다수의 작품들을 출판합니다. 문학적 성공과 함께 그는 미얀마 양곤의 주재 명예영사로 임명되며 정치적 거물로도 성장합니다. 이후 스페인 마드리드 주재 영사로 근무지를 옮겼는데 그가 영사로 재직한 시절 스페인 내전을 목격하게 되고 이후 그는 공산주의를 자신의 정치 노선으로 선택합니다.

주재영사 근무를 마친 후,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로 귀국하여 상원의원을 거쳐 정치활동을 시작합니다. 이후 대통령에 취임한 곤살레스 베딜라 대통령의 탈공산당 행보에 반대하여 비판하다 국가원수 모독죄로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망명생활을 시작합니다.

망명생활 동안 아시아, 유럽, 미국 일대를 떠돌아다니며 미국 대륙의 역사에 관한 시집인 <위대한 노래>를 발표하는 등 문학적 재능을 이용하여 자신의 건재함과 정적에 대한 비난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6년 동안의 망명생활 이후 곤살레스 베딜라가 물러나자 1952년에 귀국한 그는 창작활동에 몰두하고 자신과 같은 노선의 대통령 후보인 살바도르 아옌데를 추대하며 그의 당선을 위해 협력합니다. 이후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으나 1973년 아옌데 정권이 쿠테타로 무너지자 암이 발병하여 사망하고 맙니다. 허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네루다가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2. 영화 <네루다>

영화 네루다는 네루다의 6년 망명시절을 조명한 작품입니다. 나라를 떠난 후 자신의 문재(文才)를 이용해 정부를 비난하자 당시 대통령인 곤살레스 베딜라는 비밀경찰 오스카를 투입하여 네루다의 흔적을 쫓습니다.

허나 네루다의 행방은 알 길이 없고 그에 대한 자그마한 단서라도 찾길 원했던 오스카는 네루다의 저서를 정독하다 그의 문장과 사상에 매료되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은 네루다와 같은 국적과 이름을 가진 파블로 라라인 감독으로 국내에는 재클린 클린턴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인 <재키>의 감독으로 알려져있습니다. 파블로 라라인 감독은 사실 재키보다 네루다를 먼저 제작하고 싶어했지만 경제적인 상황 때문에 재키의 제작을 먼저 하였고 이후 자신이 그토록 찍고 싶어하던 <네루다>를 찍었다고 합니다. 일대기 영화를 잘 만들기로 소문난 라라인 감독이 그가 가장 찍고 싶어했던 <네루다>로 어떤 성적을 거둘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3. 파블로 네루다의 숨겨진 이야기

사실 네루다는 그에게 망명의 원인을 제공한 곤살레스 비델라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습니다. 영사 생활 이후 1945년 귀국한 그는 공산당에 가입 후 공공의 정의를 주장하던 곤살레스 비델라를 흠모하여 선거운동에 동참하였고, 비델라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허나 당선 후 비델라는 조직적으로 파업과 시위를 주도하는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불만을 갖게 되어 공산당을 불법단체로 지정하고 공산당원들을 탄압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네루다는 대통령을 탄핵하는 연설문인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했는데, 비델라는 기다렸다는듯 이를 빌미로 그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네루다는 미얀마, 싱가포르, 스리랑카, 자바에서 해외영사로 근무하던 시절, 평소 자신이 꿈꿔왔던 동양의 유토피아를 체험하고자 했으나 그곳에 있던 것은 빈곤과 질병, 수탈 뿐이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해외영사는 지금의 대사관과 달리 경제적 지원이 없는 명예직이었을 뿐이기에 그 역시 궁핍한 생활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가 영사시절 결혼했던 아내는 네덜란드인으로 그의 모국어인 스페인어를 할 줄 몰라 깊이있는 대화가 불가능하였고 그렇기에 그는 오로지 시를 씀으로서 자신의 고독을 달래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다. 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겨울에서였는지 강에서였는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아니,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도, 침묵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다.
밤의 가지들로부터,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분길 속에서
혹은 내가 홀로 돌아올 때,
얼굴도 없이 거기에 지키고 섰다가 나를 건드리곤 했다.

난 뭐라 말해야할지 몰랐다.
나의 입은 이름부를 줄 몰랐고 나는 눈멀었었다.
그런데 무언가 내 영혼속에서 꿈틀거렸다.
열병 혹은 잃어버린 날개들이
그 불에 탄 상처를 해독하며 난 고독해져 갔다.

그리고 막연하게 첫 행을 썼다.
형체도 없이, 어렴풋한, 순전한 헛소리,
쥐뿔도 모르는 자의 순량한 지혜
그때 나는 갑자기 보았다.
하늘이 걷히고 열리는 것을, 혹성들을, 고동치는 농장들을,
화살과 불과 꽃에 만신창이가 된 구멍뚫린 그림자를,
소용돌이치는 밤을, 우주를 보았다.

그리고 나, 티끌만한 존재는 신비를 닮은 신비의 형상을 한,
별이 가득 뿌려진 거대한 허공에 취해
내 자신이 심연의 순수한 일부임을 느꼈다.
나는 별들과 함께 떠돌았고, 내 가슴은 바람 속에서 멋대로 날뛰었다.

<시가 내게로 왔다>
- 파블로 네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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