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의 기대와 달랐던 엄마의 삶을 보고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나는 엄마같은 엄마가 안될거야.’
내가 엄마에게 정말 바라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면 ‘관심’이었던 것 같다. 언제나 나를 지켜봐주는 따듯한 눈 빛.
초등학교때 학교에서 글짓기 대회 1등을 해서 상장 받았다. 엄마의 기쁜 모습을 상상하며 집에 달려갔다. 그런데 엄마의 반응은 “잘했네.” 하고 옅은 미소가 끝이었다. ‘경사났네 경사났어’ 수준은 아니더라도 ‘우와, 우리 딸 대단하네’ 정도는 기대했던 것 같다. 생각지도 못한 뜨뜨미지근한 반응이었다. 그 일 후 나에게 상장은 그냥 종이 쪼가리 같은 것이었다. 초등학생 때 미술과 글짓기로 꽤 많은 상을 받았는데 항상 책상 서랍에 꼬깃꼬깃 들어있다가 학기가 끝나면 집으로 가져가곤 했다.
어쩌면 나는 엄마가 나만 보길 바랬던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엄마는 같은 곳에 있어도 금방이라도 떠날 것 만 같은 존재였다. 어릴 때 엄마가 가출을 한 적이 있었다. 예민하면서도 강철 같은 아빠에게서 버티지 못하고 집을 나간 엄마는 결국 다시 돌아왔지만, 나에게 엄마는 늘 같이 있어도 같이 있는 것 같지 않은 존재였다. 아빠 또한 집을 떠났지만 언젠가 다시 엄마처럼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그런데 엄마가 다른 아저씨를 만나는 것을 알고 난 후 불안해졌다. 아빠가 다시 돌아올 자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불안했고, 언젠가 아빠 아니면 엄마 둘 줄 하나는 내 곁을 떠날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었던 것 같다.
어떤 날은 아주 늦은 밤 교회로 뛰어가 강대상 앞에 무릎꿇고 울며 기도했다. “하나님 제발 엄마 아빠가 이혼하지 않게 해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대학생이 되어 객지에 살면서 쉽지 않은 생활을 했었다. 이런게 우울증인가 싶은 찰나에 쐐기를 박아주었던 엄마의 문자 “엄마 아빠 이제 서류상 이혼이 되었다.” 아빠의 오랜 부재로 결과는 뻔했고 예상도 했지만 생각보다 마음이 공허함이 크게 느껴졌다. 다시는 우리 네가족이(남동생이 있다) 함께 웃으며 만날 일은 없겠구나. 상처가 난 자리를 다시 꿰멜 기회같은건 아예 없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생때 자취를 하는 친구들을 보면 엄마가 택배로 집반찬을 바리바리 싸서 보내는 걸 봤다. 당연히 우리 엄마는 그런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알아서 밥을 해먹거나 사온 음식으로 떼웠다. 자취방 주인 아주머니가 가끔 해주시던 꼬막무침이 있는 날이면 밥 두공기는 삽가능했다.
나는 엄마에게 반찬 좀 만들어 보내달라는 말 한마디를 왜 못했을까. 학창시절 식당일 하고 집에 늦게 들어와 내가 등교할때까지 늦잠 주무시는 엄마를 깨우지 못하고 스스로 도시락을 쌀 정도로 어른아이가 되었던 나는 엄마에게 무언가를 요청하는 방법을 까먹었던 것 같다. 아니 사실 그래도 되는건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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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엄마 같은 엄마는 안될거야.
나도 모르게 되뇌었던 내적 맹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