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답다는 말 예전엔 참 쉬운거라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되니 참 어렵다. ~ 답다는 말이 이렇게 답답하게 느껴질 일이었나. 엄마라는 단어는 세상에서 가장 포용하는 것이 다양하고 넓은 포괄적인 단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시어머님께서 말씀하셨다. "막내딸아 바다 같은 사람이 되어야한다. 바다는 다~ 받아내주어서 바다야. 많은 것을 품고 안을 줄 알아서 바다인거야."
엄마는 뭐라 딱 정의내리기 어렵다. 엄마는 호랑이 선생님 같기도 하고, 토끼 같은 친구이기도 하고, 때론 요리사, 때로는 의사선생님, 때론 청소부와 세탁소 아줌마가 되기도 한다. 여러가지 다양한 역할과 모습을 가진 엄마에게 ~ 답다라는 말을 쓰기엔 그 단어 자체가 작게 느껴진다.
나는 나의 남편도 품어야하고. 나의 자녀도 나의 부모님도 품어야한다. 그리고 나 자신도 안아줄 줄 알아야한다.
우리 엄마에게 엄마다움을 강요했던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때론 엄마 답다는 말이 얼마나 숨막히는 말인지...
엄마 다운거 말고 그냥 나 다운거 하면 안되나.
엄마도 그냥 나의 일부분이니까.
20살이 되면 민증은 지갑에 꽂힐지라고 아직 어른이 덜 된 것 처럼, 첫 아이를 낳고 엄마라는 타이틀을 달았지만 하루아침에 완벽한 엄마가 될 수는 없다.
모든 것엔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크리스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아도 여전히 성화의 과정을 지나가야만 하듯이 나도 성인이 되고 엄마가 되면서 나라는 사람이 성숙되고 여물어가는 과정중에 있는 것 같다.
30대의 우리 엄마도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주어 꽃이 되길 바라듯이 집을 떠나버린 아빠가 아닌 다른 사람이 불러주는 그 이름에 반응했을 것이고, 도망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담배는 어쩌면 도피성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엄마가 엄마의 삶을 살아내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자녀를 향한 무조건 적인 헌신... 그것도 받아본 사람이 아는 것이지 않았을까. 엄마는 엄마의 최선으로 나와 내 동생을 사랑했을 것이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엄마처럼 살지 않을거라 수없이 마음속으로 다짐했지만, 나는 엄마처럼 살고 있다. 모양과 형태만 다를 뿐 나도 자녀를 위해 내 인생을 올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받은 엄마의 돌봄과 비교해보면 나는 훨씬 기능적으로 정서적으로 넘치는 사랑을 자녀들에게 주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100는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올인하면 할 수록 나 자신이 점점 작아지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다.
엄마라는 삶에 All in 하지 않고
엄마라는 타이틀을 가진 나 자신에게 All in 하려고한다.
그게 그거 같지만 많이 다르다.
나는 자녀와 남편에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나 자신을 희생하면서 까지는 아니다. 나 자신도 사랑하고 돌보면서 내 가족들을 사랑라고 돌볼 것이다.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던 나는 오히려 지금 엄마를 보며 배운다. 오히려 엄마가 그렇게 살아줬기에 끝까지 나와 내 동생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킬 수 있었을 것이란 것을 이제 알게 되었다. 아이러니이지만 엄마 답지 않았던 엄마 다움이 가족을 지킬 수 있는 힘이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던 엄마의 행동들 하나하나가 엄마의 최선이었음을 알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어쩌면 아직 다 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맙다. 엄마가 여전히 나의 엄마여서. 엄마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