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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디아 Oct 02. 2021

엄마의 또 다른 이름, care giver.

엄마도 돌봄이 필요해


 내 주변에 몇 안되는, 학업과 육아를 병행하는 지인과 간만에 수다타임을 벌였다. 살림하며 육아만해도 버거운 나에겐 아주 귀감이 되는 언니사람친구. 연대 박사과정 중인 언니는 연구 주제 중 하나가 환자 보호자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환자가 아닌 환자의 보호자를 위한 연구. ‘와 정말 꼭 연구되어져야 할 주제다!’ 싶었다.


환자를 돌보는 가족 또는 간병인들이 겪는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있다. 환자 못지 않게 힘든 시간을 보내는 환자 보호자들을 가까이서 봐왔던 나는 정말 그들을 위한 연구와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나 자신도 수년간 내 자녀들의 중증 아토피를 돌봐주는 환자 보호자이다.




환자 보호자의 날을 정하고 특정 기간 동안 무료로 환자 보호자와 상담을 진행하는 것을 알리는 포스터였다. 포스터에 나와있는 환자 보호자들이 겪는 정서적 어려움은 모두 내가 경험한 어려움들이다.


1. 환자와의 소통 어려움/분노(무력감)

2. 과중한 책임으로 인한 부담감

3. 죄책감

4. 불안, 우울 등 기분 장애

5. 가족 내 구성원 역할 변화에 따른 가족갈등



 포스터를 캡쳐하여 지인에게 보냈더니 “오 맞어 caregiver!” 라고 답장이 왔다. care giver... 영어로 접하니 뭔가 생소했지만 뭔가 직관적인 단어가 마음에 확 꽂혔다.


영어사전을 찾아보니,

 [care giver: 아이나 병자, 불구자를 돌보는 사람/(가정에서 환자나 노인을)돌보는 사람] 이라고 한다.


 결혼하기 전의 나는 누군가에게 돌봄 받는 것도 누군가를 돌보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일찍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증조 할머니 손에서 자라,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나를 낳고 길러야만 했던 친정 엄마에게, 육아란... 답을 모르는 숙제 같았을 것이다. 지금처럼 육아는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 친절한 정보가 없던 당시 외할머니와의 친밀한 추억 하나 없었던 엄마에게 육아는 약간 멘땅에 헤딩 같은 것 아니었을까.


 엄마는 항상 바닥에 떨어진 내 긴 머리카락을 주우시며 어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냐하시며 나를 혼내셨다. 밤 늦게까지 일하고 들어오시는 엄마의 아침잠을 깨울 수 없을 만큼 나는 어른아이로 자라고 있었다. 도시락도 혼자 싸다니고, 소풍날은 항상 집 맞은편 김밥집에 들러 스스로 김밥을 사서 갔다. 시험기간이 되면 일절 공부에 대한 잔소리가 없어도 혼자 서점에 가서 문제집을 사다가 밤새 풀었다. 내가 무얼 하든 큰 감흥도 반응도 없었던 방목형 육아를 해오던 친정엄마에게서 정서적인 돌봄에 목말랐으나 점점 어떤 기대도 하지 않게 되었다.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만 제공(?) 받다시피 하며 자란 나에게, 돌봄이란 이 따듯한 단어는 나에게 차갑도록 낯선 개념이었다. 그래서 나 또한 누군가를 돌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특히 관심과 손길이 많이 가야하는 어린이들을 굉장히 귀찮은 존재로 여겼었다. 아이들에게 소비할 정서적 에너지가 나에겐 없었다.


 내가 돌보는 것이 어려운 사람이라는 사실은 알게 된 것은 결혼 이 후 였다. 남편은 나와는 정반대의 가정환경에서 자라왔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지만 어떻게든 손수 만든 음식을 해먹이시고 지극 정성으로 자녀들을 위해 밤낮 기도하고 헌신하시는 시어머니에게서 자랐다. 남편은 결혼 초반 나에게 어머니와 같은 돌봄을 기대했다. 그러나 나는 남편에게 딱 잘라 말했다.


“나는 당신의 아내이지 엄마가 아니야.”


 나의 이 단호한 멘트 이후로 남편은 시어머님이 아버님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행하신 당연하다 여겼던 헌신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자기가 먹은 밥 그릇은 자기가 싱크대에 넣는 것은 어린아이도 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나에게서 더 이상의 돌봄을 요구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 것 같다. 마침 결혼하자마자 첫째를 가졌기에 내가 몸조심 해야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러던 내가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었다. 한 번도 나에게 장착해 본 적 없던 돌봄이라는 기능을 나에게 장착해야만 했다. 나의 돌봄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가 내 눈앞에서 존재감을 뿜뿜 드러내며 울어대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밤새 수유하고 아이를 재우고 보살피는 일은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쏟아내야하는 일이었다. 나의 시간과 의지와 노력을 쏟아 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제서야 알았다. 친정엄마도 이러한 과정을 그대로 겪으셨음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시간의 헌신과 수고의 돌봄이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첫째가 돌이 지나고 나서 피부염이 생겼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연고를 바르면서 케어했는데 낫고 재발하고를 반복하더니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양볼에서 진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황이 되어 입원까지 하게되었다. 깨끗하게 회복되어 퇴원 했는데 곧 엄청난 리바운딩 현상이 나타나 전신으로 피부가 뒤집어졌다. 대학병원에서 화폐상 습진이라는 진단을 받고 울산에서 부산으로 매주 금요일 통원치료하던 나는 끝이 안보이는 치료과정에 지치게 되었고 겉만 치료하는 방식인 스테로이드를 끊고 체질을 바꾸는 자연 치유를 선택했다.



 자연치유 시작하면서 아이의 치료을 위해 나의 잠을 반납해야했다. 아이가 자면 약탕을 직접 끓이고, 무공해 반찬을 해먹이기 위해 삼시세끼 반찬을 바로바로 만들어 주었다. 한시간 두시간 마다 깨어 간지러움에 짜증내고 힘들어하는 아이를 달래고 다시 재우기를 몇 번 하면 해가 뜬다. 낮 동안 아문 상처를 밤이 되면 다 할키고 뜯어 놓아 아침마다 피와 진물로 말라버린 아이의 피부와 이불을 볼 때마다 잘하고 있는 것인가 죄책감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발작적 가려움이 올때마다 무아지경으로 긁어대는 아이에게는 그만 간지르라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러한 광경을 보고 있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곤욕스럽다.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무력감이 나의 온 몸을 휘감는 듯 하다.


 다행히 첫째는 연고를 바르지 않아도 고질적인 몇몇 군데만 제외하고는 아기 피부를 유지하게 되었다. 언니가 다 나아갈 때 쯤 기다렸다는 듯이 둘째의 피부가 뒤집어졌다.

20개가 넘는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는 둘째는 치료가 더 복잡하고 어려웠다. 둘째 역시 자연치유를 하기로 시작한지 6개월이 지났다. 피부는 진물과 염증을 쉬지않고 토해내었다. 첫째를 경험해서 그런지 둘째는 첫째에 비해 심적으로 일희일비하던 마음이 다소 침착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막중한 책임감이 나의 마음을 누르고 있고 반납한 나의 밤잠을 아직 돌려받을 수 없기에 만성피로를 달고 있다. 언니보다 이른 나이에 아토피가 피크를 찌르는 둘째는 그 과정을 훨씬 더 힘들어해 결국 연고를 바르며 케어하기 시작했으나, 본질적으로 예민한 알러지 반응에 한시도 마음 놓을 수가 없는 것은 여전하다. 출산 이 후 7년간 나에게 잠이란 사치로 여겨지고 있다. 잠을 자지 않으면서 나도 한포진이라는 피부병이 생겼다. 특정 새벽 시간에 첫째, 둘째 그리고 나까지 긁는 모먼트가 가끔 찾아오면 웃프기도 하다.

  

 부모이기에 당연히 아픈 자녀들을 돌보는 것은 마땅하게 여겨진다. 그렇다고 부모가 겪는 고충 마저 마땅하다고 여기면 안된다. 그런 인식들 속에서 겪는 환자보호자들의 억눌려진 스트레스와 어려움들은 오히려 환자의 치료를 더디게 만든다. 환자 보호자의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는 환자에게 고스란히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즉, 환자보호자가 행복해야 환자가 행복하고, 엄마가 행복해야 자녀들이 행복하다.


 요즘 나는 글을 쓴다. 아이의 상처에서 나의 시선을 돌려 나 자신을 보기 위해서다. care giver는 누군가를 돌보는 만큼 스스로도 돌볼 줄 알아야한다. 스스로를 돌보기도 힘들다면 누군가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한다. 글쓰기는 나 자신을 돌보는 방법 중 하나이다. 글을 쓰다 보면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기때문에 나를 돌보기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다. 나의 글을 보고 또 누군가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될 수 있으면 너무도 좋을 것 같다.





아이가 힘든데 엄마는 뭐가 그리 즐겁냐구요?

그거 아세요? 환자보호자가 행복해야 환자가 행복하고

엄마가 행복해야 자녀들도 행복하다는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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