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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디아 Oct 05. 2021

아픈 자녀를 돌보는 엄마로 사는 것

숙명에서 사명으로


내 딸이 아토피라니


 딸 아이가 3살이 되던 해, 남편의 이직으로 연고 없는 울산으로 터를 옮기게되었다. 지역색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느껴본 적 없었는데 울산에서의 첫인상은 참 낯설었다. 상가의 사장님들의 다소 냉소적인 말투와 표정도, 버스기사 아저씨들의 거친 운전방식도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중 첫째의 피부가 예사롭지 않았다.


울산으로 이사가기 전 발진이 생기는 피부가 걱정되어 대학병원에 갔는데 아토피가 아니라고 하며 스테로이드만 처방 받고 돌아왔다. 연고로 피부를 달랬는데 어느 순간 연고도 효과가 없는 순간이 왔다. 울산으로 오자 곧 아이의 양볼은 상처 투성이가 되고 결국은 진물이 줄줄 흐를 정도로 상태가 심해져 울산에서 제일 유명한 아동병원에 갔더니 당장 입원을 하자고 했다  피부때문에 입원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얼떨결에 입원 준비를 하게 되었다. 피를 뽑고 링거를 꽂는 과정은 17개월짜리 아이에게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일주일 동안 항생제와 스테로이드를 때려 넣으니 퇴원하는 날은 피부가 반질반질 윤이 났다. 그런데 이거 왠걸 퇴원하고 나서 아이는 한달 동안 설사를 하고 피부는 전신으로 뒤집어져버렸다. 항생제로 아이의 장내 유익균까지 다 죽어버렸고, 스테로이드 리바운딩으로 전신 아토피로 진행된 것이다.


 퇴원 후 친정엄마와 영상통화 하는데 첫째의 얼굴을 보시고는 눈물을 흘리셨다. 평생 함께 살면서 보기 힘들었던 우리 엄마의 눈물은 손녀 앞에서 이리 쉬운 것이었다. 나도 함께 울어버렸다. 그리고 밤마다 눈물로 지새는 날이 많아졌다. 당시 내가 느낀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은 견디기가 힘든 정도였다. 그러던 중 감사하게도 남편의 지인이 부산대학병원 피부과 교수로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 곳에 진료 받으러 갔다가 화폐상습진이라는 진단명을 받게 되었다. 가장 낮은 단계의 스테로이드와 스테로이드가 없는 면역조절 연고를 처방받아 아이를 케어했다. 다행히 연고로 아이의 피부는 소강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밤마다 피떡이 되게 긁는 아이를 밤낮으로 케어하느라 심신이 지치게 되었다. 금요 기도회마다 통곡하듯 쏟아내듯 울며 기도했다.

 


나와 함께 울어주는 사람들


 어느 금요일 밤 교회에서 딸 아이를 놓고 울며 기도하는데, 옆에 앉아있던 사모님이 한 분이 물었다. 첫째는 괜찮냐고, 건강한게 최고다고 다른건 바라지도 않는다며 사모님의 자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첫째는 천식을 앓고 있고 둘째는 가와사키를 앓은 후 심장병에 대비 해 계속 추적 검사 중이라고 아이들을 붙잡고 밤마다 그렇게 울었다고. 아픈 자식을 가진 부모의 마음은 모두 하나다. 다른건 바라지 않는다. 다만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울산에서의 시작은 이렇게 쉽지 않았다. 남편은 밤 12시가 넘어야 퇴근하여 들어와서 오로지 독박육아를 정신력으로 버텼다. 밤마다 간지러워 깨는 아이를 달래고 재우고 몇 번 하면 해가 떴고 나는 밤이 오는 것이 두려웠다. 점점 몸도 마음도 지쳐가는 것 만 같았다.


그렇게 몇개월이 지나고 나와 나이가 같은 교회 분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나이가 같은 첫째끼리 서로 베프를 먹어 엄마들끼리 금방 친해졌다. 그러면서 그 집 첫째의 이야기을 듣게 되었다. 첫째는 부신피질기능저하증으로 몸 속에 천연 스테로이드가 생산되지 않아 평생 스테로이드를 먹어야하는 질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이었다. 어릴때부터 몸이 많이 약해 두달에 한번은 입원을 했고 심할땐 한 달에 두번 입원 한 적도 있다고. 하도 링거바늘을 많이 꽂아 20개월도 되지 않은 아이가 양 손등과 팔, 발등까지 혈관이 다 터져 입원할때마다 혈관을 찾느라 애를 먹는다고... 스테로이드 부작용이 무서워 아이 피부에 살짝 바르는 것도 손을 덜덜 떨던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생 하루 세번 스테로이드를 복용하고 그 부작용을 감수하며 살아야하는 자녀를 가진 엄마 앞에서 나의 불평과 불만이 어쩌면 교만이 아닌가 느껴졌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오히려 항상 날 격려해주었다. 자신의 자녀는 약만 잘 먹으면 일상생활은 어렵지 않은데 우리애는 밤잠도 못자고 먹고 싶은 것도 잘 못먹으니 얼마나 힘드냐고 마음이 아프다고. 우리는 서로를 위해, 그리고 서로의 자녀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이가 되었다. 나의 아픔과 고통을 공감하는 한 사람이 내 삶에 얼마나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지 격하게 느끼는 시간이었다.


 같은 아파트 단지 함께 교회를 다니는 또 다른 지인이 생겼다. 그 분과 친해지기 전까진 개그우먼이 꿈이었다며 늘 유쾌하고 밝게 웃는 모습 뒤에 가려진 아픔과 눈물의 시간을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그 분의 첫째는 뇌전증을 앓고 있었다. 신생아 때 산후조리원에서 노로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데 바이러스가 뇌로 침투했다. 그 후 발작적인 경련이 수차례 찾아왔고 그 강도는 세지고 횟수는 더욱 빈번해졌다. 처음 진단 받았을 때 살아있는 것만으로 기적이며 산다고 해도 치료하는 약이 너무 세서 평생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르고, 말을 못하게 될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정말 드문 케이스로 지금은 쉬지 않고 뛰어다니고, 쉬지 않고 말하는 천진난만 사랑스러운 아이로 자랐다. 하지만 수시로 찾아오는 경련에 늘 딸 아이의 컨디션 조절에 애를 쓰고 노심초사하는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순간들을 겪어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것. 그것만이 그 분을 지금까지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숙명에서 사명으로


처음 자녀가 아프면 가슴이 철컹 내려앉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최고의 것을 자녀에게 해주어 그 상황을 벗어나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싶어진다. 실낱같은 완치의 희망을 붙들고 이 방법 저 방법 시도하다보면 그 방법이 맞을 때고 있고, 또 수많은 변수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반복을 경험하면서 무력함이 찾아 온다. 나의 지식과 능력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 앞에 멍하니 주저앉게 된다. 그러다 점점 눈 앞에 주어진 일상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시간이 온다. 피할 수 없는 숙명. 겪어야 하는구나. 지나가야하는 일이구나. 어쩌면 지나가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나에게만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던 일이 일어났을때 현실감이 떨어질때가 있다. 이것이 바로 현실임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자녀가 아프면 당연히 부모의 마음으로 그 옆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나 동시에 그 옆에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엄마이기 이전에 나 자신이기때문이다. 아픈 가족을 돌보는 일은 당연한 일이기에 보호자의 고충도 당연하다 여기면 안된다. 대체자가 없는 caregiver의 삶은 가끔 막다른 골목에 와있는 것 같은 때가 있다. 누구도 나를 대체 할 수 없는 끝없는 이 싸움은  보장된 승리도 대신 싸워줄 지원군도 없다고 여겨져 막막할 때가 있다. 그런 긴 싸움 중에 내가 아닌 다른 care giver들을 만나면 ‘나만 힘든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이들의 고통에 위로를 얻는 것이 아니라, 같은 싸움을 해나가는 동지들을 만나는 느낌이랄까.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고 또 지나 숙명을 사명으로 여기는 순간이 찾아온다. 더이상 이 일은 그저 지나가야할 일이 아니다. 물론 생각보다 빨리 지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더이상 끝나고 말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종료 카운트와 상관없이 이제는 주어진 상황 상황들 가운데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치료 완주를 위한 동반자로서 나의 사명을 다하기 시작하면서 나의 평생을 살아가며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게 되는 불변의 진리들을 깨닫게 된다. 미시적인 것에서부터 거시적인것 까지 삶과 인생에 대한 가장 보편적이고, 식상할 정도로 당연하지만 그래서 무시하기 쉬웠던 영원한 진리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진리들은 작은 것에 일희일비 하지 않고, 나의 페이스를 유지하게 하는 힘이 된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을 울산에서 보내게 된 것은 어쩌면 정말 말 그대로 ‘신의 한 수’였지 않았을까. 견디기 힘든 순간들을 견디게 해 준 또 다른 care giver들 과의 만남과 깊은 사귐은 이전에도 이 후에도 다시 만나기 힘든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나의 가장 어둡고 슬픈 시간들을 함께 걸어가주고 나와 내 자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겨준 또 다른 care giver들과 글엔 나와 있진 않지만 함께 자신의 일처럼 여기며 기도해준 수 많은이들의 기도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심리학에서 자주 인용하는 개념 가운데 '상처받은 치유자(wondedhealer)'가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반인반마의 모습을 한 '키론'의 일화에 처음 등장한 용어로, 키론은 비록 괴수의 몸을 하고 있지만 예술, 과학, 의학에 능해 아킬레스와 헤라클레스, 에스클레피오스 등을 제자로 둘 만큼 지혜롭고 학식이 깊었다. 어느날 헤라클레스가 히드라의 피를 묻힌 활을 쏘아 키론의 무릎을 명중시켰다. 그런데 키론은 불사의 존재라서, 영원히 치유하지 못할 상처와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할지언정 뛰어난 의술로 다른 사람을 치료하고 제자들을 키웠다. 즉, 치유하지 못할 상처를 간직한 채 다른 이의 상처를 치유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칼 융은 이 신화를 빌어서 정신분석학에 '상처받은 치유자'개념을 도입했다. 융은 '산다는 것 자체가 늘 상처와 함께하는 일'이라고 했으며, 특히 정신과 의사와 심리 치료사들을 '상처받은 치유자'로 명명했다

                                                   - 책 ‘교사상처’ 중....




나 또한 키론처럼 wondedhealer가 되어 주변의 수많은 caregiver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예전부터 심리상담에 관심이 많았고, 사실 그림책 테라피 모임도 그림책이 나의 치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치유하고 싶은 생각에 좋은 도구가 될 것 같아 참여했었다. 진지하게 심리학 공부도 생각 중이다. 대상이 좁혀지지 않아 고민이 많았는데 내가 만날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은 care giver이면 좋을 것 같다. 당신을 백퍼센트는 아니지만 많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리고 잘하고 있다고.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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