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병신아. 너 때문에 밥 먹으러 간다.
오늘 문자를 받았다. <최__ 1주기 추도식 알림>
이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는데, 맞았다.
산사람의 시간은 금세 간다.
너는 그곳에서 1년을 묻혀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내 기억에서 1년 동안 너를 묻어 두었나 보다.
실없는 녀석은 그렇게 실없이 떠났다.
내 모든 걸 바쳐서 미친 듯이 놀고 웃고 즐겼던 대학교 1학년 생활을 함께한 내 동아리 동기. 밤새 합주를 하고 밤 12시면 '방바닥'이라는 합주 시험을 보고, 새벽이 되어서야 자려고 동아리 방에 스티로폼 깔고 옹기종이 누워 수다를 떨던 내 동아리 동기.
유난히 동기들 중에서 '또라이'같은게 아니라 진짜 '또라이'어서 미래가 걱정되던 애.
휴학을 하고 다른 학교를 갔다가 다시 다니던 학교로 재입학을 해서 거진 10년은 학교 생활을 하던 만년 대학생이던 늦쟁이 친구. 덕분에 동아리에는 너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10년 터울 나는 사람들까지 모두 너와 스스럼없이 지냈더랬다. '분당 부자'라고 놀려도 끄떡도 안 하고 모든 기념일마다 잊지 않고 참석하던 정 많던 애.
이름만 떠올려도 픽, 하고 실없이 웃음이 나다가 입꼬리의 실룩거림이 금세 울먹임으로 바뀌려 해서 애써 입술을 물었다. 왠지 울면 지는 것 같아서..
참석여부를 물었다. 식당 예약을 위해서.
<참석하겠습니다>라고 답문을 보냈다. 식당 예약을 위해서.
나중에 민규가 함께 가자고, 함께 밥을 먹자고 했다.
죽은 사람을 만나러 가는데, 산 사람은 내내 밥타령이다.
그래도 나와 민규가 오랜만에 만나 먹는 밥은 너 때문인 거니까, 네가 밥을 주는 것이 되었네.
그래도 왠지 일요일에 너를 만나러 갈 생각을 하니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그날 나는 분명 울겠지만.
#1. ‘윽, 내 이럴 줄 알았지…’
시간 1.
하루는 예측하지 못한 사건들로 벌어진다.
오늘 아침이 그랬다. 기어코 늦어 버렸다.
12시에 추모식이 시작된다고 말을 전해 들었건만 잠에 취해 나가야 할 시간에 일어나 버렸다. 물 한 모금도 못 마시고 전철에 몸을 실었다. 이상하게 일어나서부터 <봄날은 간다>가 귓가를 맴돌았다. 청아하게 아련한 그 목소리가 이상하게 그리웠더랬다. “분당 메모리얼 파크 가 주세요.” 택시를 타니 전국 노래자랑이 흘러나왔다. 대단하다. 송해 아저씨.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즐겨보던 프로그램이다. <출발 비디오 여행>을 슬그머니 틀어도 다시 채널이 돌아가곤 했다. 이상하다. 오늘 옛 기억들이 자주 등장한다. 저 멀리 행렬이 보인다. 기도시간이 끝나고 묘지를 한 바퀴 돌고 있다. 얼굴이 새겨진 동판이 붙어있다. 전에는 없었는데... 그리고 큼지막하게 액자도 하나 준비하셨다.
‘윽, 내 이럴 줄 알았지…’
평온하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무너지고 만다.
그 날 장례식에서 평소의 퀭한 모습 하나없이 가장 건강하던 때의 모습으로 영결 사진 속 너를 본 그날처럼. 저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시간은 돌고 돌아 너는 일 년의 시간을 맞이했는데, 미안. 나는 그 일 년 동안 살아가는 데 시간이 쫓겨 너를 위한 자리를 많이 마련해 놓지 못했어.
마음을 추스르고 다가가는데 그의 동생이 나를 찾는다. “이번 달에 결혼하는 분 있다고 들었어요. 이거 전달 부탁드립니다.” 오늘 오지도 않은 그놈 뭣하러 챙겨 주냐고 욱하는 마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어떻게 알고 결혼식 하는 친구를 위해 축의금을 챙겨준다. 모든 동아리 행사에 참가하던 그 정 많은 녀석의 얼굴이 스쳐간다. 집안 내력이었구나. 정 많은 건... 겨우겨우 그 녀석 앞에 섰다. ‘자주 오지 못해 미안해. 잘 있었지?’ 괜히 몇 마디 속으로 전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감정이 오가는 걸 보니 안심이다. 아직 심장이 그의 부재를 슬퍼하고 있음이 다행이었다. 언젠가 이 슬픔이 바람처럼 증발하겠지. 아쉽게도 그때가 나를 찾아오겠지만 다행히 오늘은 아니다. 다행이다. 처량 맞게 슬퍼 울고 있어도 되는 시간이다. “와줘서 고마워요. 이 근처에 식당 마련했으니까 밥 먹고 가요. 먹고 갈 거지?” 그의 어머니가 손을 꼭 부여잡고 밥을 청한다. “아… 저… 그게…” 민규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다 “네네. 갈게요 어머니”라고 말을 전했다. 그냥 떠나면 안 될 것 같았다. 동네 후배 하나, 멀리서 와 준 친구 하나 이렇게 셋일 줄 알았는데 어느새 보이니 여덟이다. 고맙네. 그래도 이렇게 많이 와줘서. 내가 뭐라고 고마운 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방문이 고맙다. 그렇게 밥을 먹고 가려고 인사드리러 나갔다. “어어 잠깐만 애기 아빠가 저기 계셔…”라며 잠시 자리를 비우고 다시 찾아온 그녀가 봉투를 내민다. “와줘서 고마워. 이거 차비라고 생각해요.” 애도 아니고, 절대 받을 수 없었다. “아니 아니, 하늘나라에서 애가 주는 거라 생각해요.” 봉투가 구겨지도록 내 손에 밀어 넣는 그 심정을 나는 모른다. 알 것 같지만 그게 그녀의 마음에 한 끝자락에 닿기라도 할까. 오랜만에 만난 얼굴들이기에 헤어지기 아쉬워 커피를 마시러 가는 길이었기에 그걸로 커피를 마시자고 합의를 봤다. 그러나 그 봉투 안에는 커피를 마시고 도 한참이나 남는 금액이 있었다.
시간 2.
‘어떡하지…’
남은 금액을 둘러싸고 의견들이 오갔다.
'방금 밥을 먹고 나온 길이라 더 무언가를 먹는 건 힘들고’, ‘가는 길 주유비로 쓰죠’, ‘놔뒀다가 내년에 오면 그때 사용해요’, ‘그냥 1/n 해요’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럼 다 같이 영화 보러 갈래?” 오케이.
모두 같이 보기 좋은 영화 <로건>을 택했다.
약속이 있는 한 명을 뒤로하고 일곱이 나란히 맨 앞자리에 사이좋게 나눠 앉았다. 50대가 된 울버린과 90대가 된 찰스가 나오는 히어로 물. 울버린은 드라이버 생활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찰스는 약을 먹지 않으면 통제 불능의 노인이 되었다.
‘히어로물이 이렇게 서글퍼도 되는 건가’
청년이 된 둘리의 애환을 그린 만화를 본 적이 있는데 마치 그런 느낌이었다.
젊음의 활약이 지나가고 남은 늙음은 그 어떤 스릴러보다 잔혹하고 시리다.
태어나서 자라고 싱그러움을 머금다 조금씩 나이를 먹고 내 시대가 지나감을 감내하는 것 까지가 인생이니까. 그러나 그것도 살아 있어야 느낄 수 있는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찾아오지 않는 일이다. 누군가는 영원히 서른 즈음에 머물러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이것도 누군가에게만 해당되는 축복과도 같은 슬픈 경험이겠구나. 그렇게 겨우겨우 돈을 남김없이 사용하고 모두와 헤어졌다. 12시 일정이라 일찍 들어올 줄 알았는데 동네에 있는 후배와 친구와 함께 저녁까지 먹고 헤어졌다.
기묘한 하루다.
그를 위한 시간이었고 그가 우리에게 주는 시간이었다.
저녁을 먹으며 우리 모두는 내일이 월요일임을 슬퍼했다. 사는 사람들의 시간은 언제나 그렇듯 다시 우리를 현실로 데려다 놓는다.
그러나 존재의 부재에서 오는 상실감은 어쩔 수 없다. 돌아오는 길에 주욱 힘이 빠진다.
그제야 그가 이 시간에 함께 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다시는 그 시간이 나에게는 오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애달팠다.
안녕. 하용아.
오늘 신경 써줘서 고마워. 덕분에 함께 오래 있을 수 있었어.
실없이 가는 시간이어서 아쉬웠고 즐거웠고 그랬어.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내년에는 늦지 않게 너를 보러 갈게. 안녕. 하용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