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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중 하나, 혹은 셋

애정의 농도가 한쪽으로 치우치면 그것은 비극이 된다.

by 피스타치오 재이

#01. 최고의 자리


“너한테는 내가 최고가 아니지?”

그러는 너한테는 내가 최고니.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사실 궁금하지도 않았다. 나한테는 네가 최고가 아니야. 그 누구도 최고가 아니야. 그런데 왜 네가 나한테서 최고이길 바라는 거지. 너는 그 자리를 나눌 사람을 이미 찾았잖아. 이미 너는 너 안에서 최고인 사람이 있으면서 왜 내 자리를 탐내는 거야. 욕심이 많은 거야, 이기적인 거야, 아님 번짓수를 잘못 찾은 거야.

나는 네가 가진 그 소유욕의 정체를 모르겠다. 네가 지목한 사람의 빈약으로 인해 채우지 못하는 그 자리를 내가 채워주길 바라는 건지, 나까지 가지고 싶은 너의 채워도 끝이 없는 욕심인 건지. 빈곤으로 인한 탐욕의 증가인 건지, 나에 대한 욕심인 건지를 모르겠다고. 하지만 사실 아무렴 상관없다.

어느 쪽으로 손을 든다 해도 안타깝게도 나는 그것에 대해 관심이 없다. 나는 이만큼 냉정한 사람인 건지, 다른 사람의 감정에 동조가 안 되는 사람인 건지. 요즘 그를 만날 때마다 좋지 않은 생각들을 하게 된다. 이럴 때는 좀 피해있어야 돼. 내가 시한폭탄 같아서 위험해.


#02. 안다, 나도

나는 그녀가 좋았다. 그 재수 없을 만큼 당돌하고 솔직한 태도와 날카로움이 좋았다. 그것은 내가 갖고 태어나지 못한 것들이었고, 노력한다 해도 나는 가질 수 없는 것들이란 걸 알기에 그런 모습의 그녀가 좋았다. 나는 그것을 그녀에게 백번이고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내가 갖고 있는 이유들은 흐릿하지 않았기에.

“선배는 내가 왜 좋아요?”

뭔 말이냐는 저 표정을 보라. 너 따위가 그 교집합 안에 들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말하는 저 눈꼬리를 보라. 대답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제대로 대답을 해 줄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궁금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런 말이나 뉘앙스를 내보인 적 없지만 수시로 나를 불렀고 챙겼다. 나 역시 그녀에게 내 애정을 고백했던 적 단 한 번도 없었다. 곁에 있을 때 보좌했던 것 말고는 따로 그녀를 챙긴 적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내비친 애정의 농도만큼은 그녀 또한 알고 있겠지. 강아지처럼 배 까뒤집고 그녀에게 복종하고 있는 내 눈빛을 이미 읽었겠지. 그런 사람이 있다. ‘내가 절대 이길 수 없겠다’, 싶은 존재들. 알파와 오메가가 있다면 나에게 그녀는 알파다. 나에게 그녀는 그런 사람들 중 하나다. 내가 알고 있는 그런 분류의 사람인 둘 중 하나다.

“너한테는 내가 최고가 아니지?”

그래. 알잖아. 너도. 그 감정이 무엇인지 나도 다른 사람에게 느끼고 있기에 나는 네가 안타까웠다. 그것은 노력한다고 해서 가져지는 것이 아니며 갖고 싶다고 욕심을 부릴수록 목마름이 더 깊어진다는 것. 그랬던 사이였다가 이제는 아니게 돼버렸다는 게. 너는 그대로인데 나는 아니어서, 그래서.


#03. 무조건적인 게임

무조건적으로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을 하는 게 어디 나라고 속상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모든 것에는 예외가 있다. “너는 아무한테나 이러냐?”라고 물으면 나는 대답한다.

너한테만 이런다고.

누구한테도 안 이런다고. 이렇게 들이대는 거 쪽팔리고 자존심 상하고, 내 감정 들키는 거 죽을 만큼 싫고 무엇보다 지는 싸움 절대 안 하는 나인데. 아무에게도 들이민 적 없다. 모른 척하거나 친구인 척하거나.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그런데 그게 너한테는 안된다. 네가 거절하면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다음 한방을 노리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나약하게나마 마음에 금이 가고 무너진다.

아.. 자존심 상한다...

내가 한순간에 병신이 돼 버린 것 같은 느낌. 들었다 놨다 일부러 저러는 건지. 후우.. 어쩌면 그것도 아니다. 몇 시간 후에나 단답식으로 문자가 오는 거보면 그냥 알아서 떨어지라는 뉘앙스 인지도 모른다. 그게 더 비참한 건가.

‘적당히 하고 알아서 꺼져’

이런 건가. 어쩌면 나는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그어놓은 적당한 선과 알아쳐먹게 냉한 기운을 풍기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 들이대는 건, 너이기에. 내가 너에게 끌리고 있으므로. 그리고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가 그렇게 나를 무시하는 게 자존심 상하지만 다시 아무렇지 않게 연락하게 되는 건 너이기에. 나 혼자 천당과 지옥을 오락가락 미친년 널뛰기하듯 하루에도 ‘너는 내가 싫으니?’ ‘내가 이러는 게 싫으면서 그냥 받아주는 척하는 거니’라고 물어보려다가 속으로 다시 집어삼킨다. 그렇게 다시 안 볼 사이 아니니까. 문제는 안 보면 내가 미치겠으니까. 그냥 적당한 거리에서 그냥 그렇게. 있고 싶은데, 문제는 너가 나한테 쌀쌀맞으니까. 뭐 그럴 수 있지. 지금까지의 우리의 전적을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꾸 밀었다 내쳤다를 반복하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안에서 맴도는 건 도대체 뭘까. 여행을 가자고 하니, 그러자고 한다. 한 번에 오케이 하는 건 뭐지. 항상 제안은 내가 한다. 단 한 번도 이 역할이 뒤바뀐 적은 없다. 털어내자 마음아. 섭섭함을 털어내자. 그래야 너가 산다. 후우. 심호흡을 깊게 해본다. 얼른 섭섭함이 몰려오기 전에 다시 쿨한 상태를 유지하자꾸나. 우리는 그래서 항상 제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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