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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사총사

아무것도 무서울게 없던 그 시절 똘끼 충만했던 우리들

by 피스타치오 재이

그런 때가 있었다.

중 고등학교를 같이 나온 우리 넷은 서로와 함께라면 무서울 게 없었다.

으레 이성에게 호기심이 생길 무렵,

우리는 그것보다 만화에 흠뻑 빠져버렸고, 병맛 같은 개그에 심취해 있었다.


겨울이면 학교에 있는 동상에 기어코 올라가 장갑과 목도리를 씌웠고

만우절이면 화투를 발처럼 길게 늘어 뜨려 교실 창가에 매달아 놓곤 했다.

누군가는 수학여행 때 먼산 바라보며 찍힌 지 사진에 궁서체로 ‘아름다운 세상’이라 적고는 자기네 반 애들한테 지 사진을 팔았고. “이런 거 아무 데서나 못 구하는 거야. 너니까 싸게 줄게”

누군가는 그림 잘 그리는지 특기를 살려 <1일> 날 식권을 <8일> 날식권으로 만드는 연금술을 보여 줬으며,

반항심 많았던 누군가는 담임이 “00야, 선생님이 그렇게 싫으니. 어딜 가니. 오늘은 선생님이랑 얘기 좀 해”라며 교복 재킷을 붙잡으면, 뱀 허물 벗듯이 담임한테 붙잡힌 교복 마이에서 팔을 빼 달아나 버렸고,

새벽 연습 갔다 와 피곤에 절었던 누군가는 자고 있다가 무심결에 나갔던 ‘학년 배 줄넘기’ 대회에서 ‘줄넘기 전교 1등’을 하며 체대 입시생을 좌절에 빠뜨렸다. 그 이후로 “이봐. 자네, 체육 할 생각 없나.” 라며 쫓아오는 체육 선생님을 피해 다니게 되었더랬다.


이렇게 다른 듯 비슷한 패턴으로 살았던 우리는

하루 종일 머릿속에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살 수 있을까’란 궁리뿐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는 시점에 진로 선택 역시 단순했다.

모두 다 수학은 별로니까, 문과로.

그중에 여덟 반은 일본어 반이고, 네 반은 독일어 반이니까

‘우리가 같은 반이 되려면 확률상 독일어를 선택하자!’ 라며

말도 안 되는 확률 게임에 홀딱 반해서 2년 내내 흑마법 주문을 거는 것같던 독일어 <듣기 테이프>를 머리에 쥐가 나도록 들어야 했다.

그런데 말도 안 되게 정말 우리는 2학년 때 모두 같은 반이 되었다.

2명 더 꼬셔서 ‘육갑’이라는 모임을 만들었고. “여섯 명이서 동갑이니까 ‘육갑’이야. 너 할래?”

거기에 게스트로 한 명 더 들어오면 금세 ‘칠갑산’으로 변했다.


세월이 흘러 졸업을 했고

아무 생각 없이 “우리의 생일은 우리가 축하해 주자!”라며

생일 때마다 만나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그게 결속을 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매년 생일을 챙겨 주다 보면 금세 재미에 바닥이 나곤 했다.

그래서 “가장 쓸모없는 생일 선물을 해주자!”라며 배틀을 시전.

<스위치를 누르면 불은 켜지는 데 배터리 교환할 방법이 없는> 피규어를 사 온다거나

<시즌 상품으로는 이게 최고지>라며 <박수치면 엉덩이 흔드는> 산타 인형을 사 왔더랬다.

그냥 줘도 안 가질 법한 쓰레기 같은 선물일수록 큰 반응을 이끌기 유리했다. 반응이 없으면 왠지 패배자가 된 거 같아 다들 혈안이 되었다.

그러다 진짜 선물인데도 받으면 기분이 안 좋아져서 그만뒀다.


그러고 처음으로 여행을 떠났다.

<한적한 바다에 가자>라는 취지로 어디로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인천 대이작도에 갔다. 뱃시간에 맞춰 급하게 만나 ATM에서 여행 경비도 뽑지 못한 채로.

“가면 농협이라도 있겠지”싶었는데 배 타고 들어가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ATM은커녕 그런 문명과는 삶의 궤를 달리하는 것 같은 무인도 같은 곳에 불시착했다.

총알을 육지에 놔둔 채로.

우리는 고기도 못 샀는데.

바닷가는 너무도 평화로운 어부들밖에 없어서 준비해온 비키니는 남사스러워 못 입었다. 비상금이란 비상금을 탈탈 털었는데 5천 원 나왔나.

누군가는 쌀이 있으니 ‘고추장’을 사자고 외쳤고, 누군가는 ‘라면’이 최고라며 우겼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스크림’이너무 먹고 싶었고 생존이 걸린 그 시점에도 우리는 돈을 쪼개 아이스크림을 먹었더랬다.

쫄쫄 굶고 겨우 라면을 사고 그것도 모자라 민박 아줌마한테 흰 밥을 얻었더랬나.

상 그지가 따로 없는 생존기였다.

돌아올 때도 차 시간 잘못 맞춰서 밤에 히치 하이킹을 하고.

그게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었다. 다시는 여행 가자는 소리를 아무도 안 한다. 아니, 여행 가자 말은 나오지만 아무도 토스를 안 해 허공에서 메아리만 치더라.


그런 친구들이었다. 말 안 해도 통하고 그런 친구들은 아니었다. 말 안 하면 다들 다른 생각한다.

돈 없던 스무 살 시절 “가방이라도 만들어서 팔자!”라며 의기투합해 밤새 미싱 돌려가며 코믹월드에 가방 팔았는데 본전 빼니까 10만 원 남았나. 넷이 나눠 봤자 노동력이 더 들어간 셈이라며 신촌에서 고기 먹고 네일아트 하고 났더니 예전과 똑같이 또 그지였다.


10대 때는 ‘뭘 해도’ 또라이 같은 짓만 골라했고

20대 때는 ‘뭘 해도’ 짠하기만 했다.

그런 때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와 함께였기에 무서운 게 없었다.

그런 시기를 함께 보냈던 게 지금 또라이 같은 짓 안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다 해봤으니까.

얼마나 찐따였는지 나중에 깨달았을 때 얼마만큼의 쪽팔림이 엄습하는지 알았으니까.


문득 ‘내가 걔네랑 왜 친해졌지?’ 란 생각이 들었는데

이런 무시무시한 일들이 전부 생각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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