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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식이란

나는 절대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 오만함에 대하여...

by 피스타치오 재이

어릴 적 나에게 그는…

어릴 적 나에게 아버지는 피하고 싶은 존재였다. 그는 아빠의 실체보다 훨씬 더 공포로 다가왔었다. 세네 살 즈음에 가족끼리 공원에 놀러 가 엄마가 사진을 찍어준다며 나를 아빠에게 안겨 놓으면, 나는 자지러지게 울었다. 아빠와 둘이 남겨지는 게 너무 무서워서. 대다수의 청소년이 그러하듯 “다녀오셨어요”라는 인사를 끝으로 방으로 숨었다. 어색함과 꾸중을 피해서. 어릴 적 나에게 아버지는 이유 없이 피하고 싶은 존재가 되었다.


내가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나는 엄마가 내 엄마인 것이 너무 좋았다. 엄마는 다른 엄마들에 비해 어리숙했고, 한글에 서툴고 영어는 아예 몰라 엄마는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카테고리에 있었다. 내 나름대로의 반항에도 엄마는 하염없이 나를 기다려줬고, 내 톰보이 시절의 삐뚤어짐에도 하염없이 나를 이뻐했다(지금 생각해봐도 이해 못할 정도로). 아빠같이 심술 맞은 사람과 사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런 아빠 아래에서 엄마는 한없이 약자였다. 그럼에도 몸이 안 좋은 아빠 때문에 엄마는 늘 아빠의 건강상태에 안절부절이었고 그런 엄마를 내가 지켜줘야겠다, 생각했다.


아쉽게도 나의 스물에서 서른까지…

나의 부모 역할은 거의 없다시피 할 만큼 존재가 흐려졌다. 불꽃처럼 나는 나가 놀았고 집에 관해서는 소홀했으며 부모님은 성인이 된 자식을 품에서 놔주려고 애써 관여를 안 하셨다. 덕분에 흥청망청 흘러 흘러하고 싶은 것들을 위주로 하면서 흘러 흘러갔다.


서른이 지나자

나는 아빠가 나의 아빠인 것이 너무도 좋았다. 그전까지는 가져보지 못한 감정들을 갖게 되었다. 나중에 결혼을 하고 내가 한 아이의 부모가 되었을 때 느끼게 될 감정을 미리 보기로 보고 깨닫게 된 것 같다. 어느 순간 불현듯 찾아왔다. 그리고 이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깨닫는 순간. 나는 어른이 되었음을 느꼈다. 고등학교 진학을 할 때도. 대학교를 갈 때도. 진로를 정할 때도. 뭐든 걸 내가 정하고 결정된 후 통보하는 딸내미에게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나의 부모는. 나는 내 고민을 나누기 싫어했고, 나 때문에 온통 그 생각으로 하루 종일 생각을 곤두세우는 그들이 싫었고, 그들의 의견을 강요당하는 걸 싫어하는 성미를 아니까, 그냥 말없이 들어주셨다. 그리고 내 생각을 언제나 존중해주셨다. 내가 그들을 워낙 잘 알고 있으니까, 사실 그들을 설득하는 건 어렵지 않다. 어떤 미사여구로 얘기를 어떤 식으로 풀어나갈지 이미 어렸을 때 파악했다. 이게 젤 무서운 논리이지 않을까. 머리 꼭대기에 앉아있는 자식이라니. 듣지도 않는 나에게 '희망'과 '꿈'에 대해 설파하는 것이 얼마나 '소 귀에 경 읽기'였을까. 듣는 둥 마는 둥, 아침마다 돈 필요하다며 돈만 받아가는 못된 딸이었다. 아빠와 싸울 때면 내 의견이 틀렸음을 알면서도 번번이 자존심 때문에 바득바득 우겼고, '자신도 그렇게 살지 못했으면서 나한테 그러라 말하지 마라'며 비수를 꽂았다. 시간이 지나서야 나에게 그들이 얼마나 많은 인내와 애정을 불어넣었는지 알게 되자, 나는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었다.

그저 내가 지금 하는 일이라고는 지나칠 정도로 했던 말 또 하는 아빠의 얘기들을 두런두런 들어 드리고, 사놓고 한 번도 안 입은 옷들이 옷장에 수북함에도 또 쇼핑센터에 가는 엄마의 곁을 말없이 동행할 뿐이다.

이런 나를 우리 집에서는 ‘집사’라부른다.

위가 안 좋은 아빠를 위해 일주일 치 생 양배추를 한 시간이 넘게 착즙 할 때면, 아빠는 "수고스럽게 하는 것 같아 고마우면서 미안하다"라고 하신다.

전혀요. 중학교-고등학교 6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아침 아빠가 짜주신 양배추즙을 마셨는걸요. 전.

우물 안 개구리는 하늘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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