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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랍 속의 그녀

오랜만에 만나도 여전히 좋은 사람. 사람 냄새 가득한 관계.

by 피스타치오 재이

아무런 욕심 없이 친해진 사이는 언제 만나도 스스럼이 없다.

그가 높은 직책에 있어도 내가 아무리 부랑자여도 둘이 만나면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가버린다.

사회 초년생의 어리바리함과 치이는 일상의 고단함을 고스란히 나눠가졌던 그때로.


신용산의 큰 사옥에 자리한 그녀의 회사 아래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땡.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열댓 명의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온다. 아쉽게 내가 찾는 얼굴은 없다. 괜스레 우산을 툭툭 치며 그 사람들을 보내고 또 한 번을 기다린다. 땡. 또 한 무리의 여자들이 우르르 나온다. 그중에서 맨 마지막에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또 모두에게 양보하고 젤 마지막 순서를 기다렸겠지. 여전하다. 지금쯤 그녀는 대리를 넘어 높은 직급을 달았겠지. 근일년만에 본 그녀는 엊그제 만난 사람처럼 익숙한 사람 냄새를 풍기고 있다.


삼계탕집에서 몸보신하며 못다 한 그간의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잠깐잠깐, 나 먼저 말하고” 둘 다 할 말이 많아 속사포로 쉬지도 않고 끊이지도 않고 잘도 말한다. 삼계탕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이게 익은 건지 안 익은 건지 관심도 없다. 씹고 있는 건 입이요, 말하고 있는 건 뇌일 뿐. 우리의 관심사와 공통점은 업무는 달랐지만 같은 업계에서 일했으니 그쪽 업계와 사람들로 이야기가 쏠릴 수밖에 없다. 내가 없는 그동안 그 세계에는 많은 일들이 생겼다 사라졌다. 언제나 시끌벅적한 곳이니까. 그녀가 몰랐던 내 2년 동안의 일들을 쏟아냈고, 내가 몰랐던 그녀의 일과 업무, 일과 사랑, 일과 가정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서울 한복판 가장 바쁜 동네에 사는 사람의 모든 사이클은 일과 함께 돌아간다. 점점 그녀가 천하무적이 되가는 느낌이다.


배부르고 등따신 점심을 사주고는 사옥 카페가 할인된다며 또 카드를 긁는다. 여기 빵이 그렇게 맛있다면 집에 갈 때 포장도 해가란다. 이 사람은 여전히 사람 좋아서 속도 없이 퍼주기 바쁘다. 오랜만에 봤고 자기보다 어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래 봤자 한 살 어리고 오랜만에 봤으니까 얻어먹어도 될 텐데 굳이 만날 때마다 이런다. 선물을 들고 가길 잘했다. 한눈에 내가 가져온 속옷 브랜드를 알아본다. 다행이다. 이름만 보고도 설레어하는 브랜드여서. 다행히 좋아한다. 이쁜 사랑 하세요. 2세 기다릴게요.


언젠가부터 관계를 이어간다는 것에 대한 타당한 근거가 필요해졌다. 왜 이 사람을 만나려고 내 시간을 써야 하지? 점점 더 짧아지는 시간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남 자체가 엔도르핀이 되었던 건 과거가 되었고 지금은 엔도르핀이 사라져 버려 그 외에 타당한 근거가 필요해져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아직은 이유가 필요 없다. 시간 나면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있는 삶이다. 항상 바쁜 그녀이기에 내가 찾아왔고 사옥을 소개해줬고 한 시간의 점심시간이 가혹할 만큼 아직도 할 말이 많이 남았다.

다행이다. 그래야 또 보러 오지.

언제든 커피 마시러 놀러 오라는 유쾌한 그녀가 아직도 여전히 많이 좋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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