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의식
아침에 잠에서 깨면 가장 먼저 눈을 감고 내면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있는다. 아무 그림도 그리지 않은 도화지처럼 비어있고 눈이 내린 뒤 아무도 밟지 않은 평원을 바라보는 듯 순결한, 파아란 하늘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는 열린 마음을 마냥 지켜본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늘 하는, 내게는 의식 같은 일이다. 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이 마음으로 잠들기, 그것이 별다른 소망이 없는 나에게 소망이라면 소망이다.
그 상태는 마치 깊은 수면 상태에서 심신이 온전한 정화의 폭포수 같은 에너지로 씻어내려지듯 아무 고민도, 걱정도, 두려움도 없이 쉬어지는 그런 시간이다. 내가 이 신성한 순간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이 담백한 마음이 우리 인생의 시작점이자 종점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마치 담담한 차를 마시면 평소 먹던 자극적인 식습관이 정화되어 제로로 돌아오듯 그렇게 마음도 빈 마음으로 가만히 있으면 다시 담백한 순수를 회복하곤 한다. 이 순수의식의 발견 그리고 누림은 인간의 자연성 회복이다. 심리학자 칼 융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했던 그것, 진정한 자기가 되는 것을 나는 그 순수의식의 회복이라고 여기고 있다.
우리 자신에게서 가장 인간다운 것은 무엇일까. 문득 떠오르는 것은 언어 사용, 도구 사용, 상상력 등이다. 그 모든 것의 바탕에 이 의식이 있다. 그것은 모두 의식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의식이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났을까. 138억 년 우주 역사, 46억 년의 지구의 역사, 그리고 300만 년 인간의 역사, 그 어디쯤에서 인간의 의식이 생겨나고 어떻게 변화 발전해 왔을까 를 생각하면 그지없이 신비하고 놀랍다.
누구야, 하고 부르면 네, 하고 대답하는 이 의식,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인 줄 아는 이 이성, 섭섭해하고 슬퍼하거나 웃으며 행복해하는 감정, 어려운 상황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는 이 의식,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느끼며 촉감을 느끼는 이 의식, 미래를 희망하고 절망하기도 하는 이 의식, 이 의식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그 근원은 무엇일까를 수많은 지도자들, 과학자, 철학자, 신경과학자, 이제는 컴퓨터 과학자들까지 그 의식을 모방하려고 연구하고 있지만 이 의식의 본질을 파헤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식을 관리하는 일은 삶을 관리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결국 이 의식의 투영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이라는 인식의 배경이 되고 바탕이 되는 이 의식을 어떻게 바라보고 관리하느냐는 우리 인간이 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탐구다.
이 의식이 없다면 이 우주 전체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 의식을 돈으로 주고 살 수 있을까.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어떤 선각자들은 이 의식 안에 영원한 안식처가 있다고 한다. 이 의식을 알아차리고 있는 그 순간이 내면의 사원에 불을 켠 상태라고들 한다. '나마스테'라는 인도 인사법에는 당신 내면의 신성한 존재, 에너지에 경배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 신성한 존재, 에너지가 바로 이 의식이다.
이 신성한 의식 진화의 최정점에 바로 여기 우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의식의 신비를 얼마나 느끼고 사는지 물어야 한다. 가장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신비를 이미 가지고 살면서도 그 존재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산다면 그것은 자기 집 창고에 금덩이를 가득 쌓아두고도 있는 줄 모르고 사는 거지와 같다. 물론 그 의식이란 것은 아무리 많은 금덩이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내면에 있는 의식뿐만 아니라 상대방, 마주하는 이의 의식을 생각하며 대하라는 것이 나마스테의 의미다. 자기뿐만 아니라 마주하는 이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 신성한 의식에 경배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선의 존중과 공경 속에서 살아가는 일이 될 것이다.
눈 뜨자마자 오늘 해야 할 일로 바쁘게 쫓아가기 전에 가만히 이 몸속에 배경으로 존재하고 있는 의식을 느껴보고 그 내면의 의식에 경배하는 맘으로 그냥 있어보자. 어떤 마음도 세워지기 이전의 텅 빈 의식, 그 의식을 느낄 수 있는 이는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자신의 의식이라는 고요한 사원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깨닫고 보면 그 사원은 이 우주 전체보다 더 큰, 무한으로 열린 사원이다. 그 사원에 머물다 보면 어떤 찌든 번뇌와 고통도 햇살에 말려지는 뽀송뽀송한 빨랫감처럼 솔솔 사라지기 마련일 것이다. 그야말로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넉넉한 무한백이 생기는 것이다. 아니다, 이미 있는 무한본성을 누리는 것이다.
아무것 아닌 것에서 행복을 누리는 비결은 누구나 가능한 일이지만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 아무것 아닌 것에서 의미를 누릴 줄 아는 사람에게만이 주어지는 행복이다. 누구나 가진 이 의식, 컴퓨터가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모방조차 불가능한,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보편적인 이 의식에서 행복을 느낀다면 그 행복은 빼앗을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는 보배다. 죽기 전까지, 아니 죽고 나서도 남는 것이 이 의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의식 수준을 향상하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나온 이유라고까지 한다. 이 의식, 어떤가. 이미 있는 이 의식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 누려봄직 하지 않은가.
ps. 위 배경사진은 사진작가 유소림 선생님의 사진으로 선생님 허락을 얻고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