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삶 자체
원형으로 둘러앉은 연수 자리에서 강사님이 불쑥 질문을 던지셨다.
“최근 자신을 위해 선물을 한 기억이 있다면 함께 나누어 볼까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머뭇거려졌다.
그런데 웬걸, 떠오르는 장면이 많았다. 돌이켜보니 그 모든 순간이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산책을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던 평범한 일상들.
‘아, 나는 오롯이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았나’ 싶다가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니 그 안에는 아이들과의 찰나, 남편과 함께한 순간들도 촘촘히 박혀 있었다.
며칠 전 독서 모임에서 지인들과 다녀온 제주 43 기행은 깊은 깨달음을 준 선물이었고, 친구들과 서울 여행에서 마주한 , 인간의 평등을 향한 질문이 담긴 바스키아의 분노 가득한 화폭과 뮤지컬 ‘라이프 오브 파이’의 감동 또한 나를 위한 축복이었다.
큰아들과 함께 명상하며 머물던 정적의 며칠도, 가족들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차를 마시던 시간까지도. 심지어 다른 이를 위한 작은 배려조차 결국은 내 마음을 풍요롭게 채워주었으니 그대로 선물이었다.
생각해 보면 타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겐 이미 선물이었다. 소중한 사람들인 아이들, 가족, 부모님, 그리고 형제자매, 친구들 모두. 삶의 모든 조각이 나를 위해 예비된 선물이었음을 새삼 실감한다.
서로의 자신을 위한 선물들을 이야기 나누며 수업이 시작되었다.
내 마음을 알아차려 잘 표현하고 타인의 마음을 귀 기울여 들으며 소통하는 법, 우울하거나 불편한 마음을 외면하지 않고 보듬어 따뜻한 본성의 에너지로 바꾸는 법을 익히는 시간 자체가 정신의 휴식같은 선물이었다.
연수가 일찍 끝난 덕분에 호텔 주변을 한 바퀴 산책했다. 20여 년 전 아이들이 어릴 때 함께 뛰어놀던 금오산 공원 넓은 터의 느티나무가 보였다. 추억이 소환되듯 몽글몽글 마음이 촉촉해졌다. 누군가가 옆에 있었더라면 온전히 누리지 못할 추억의 여운이 혼자 있으니 더 뭉클하게 느껴져 온다.
지금은 아무도 없는 카페 한 귀퉁이에 앉아 따뜻한 레드 뱅쇼 한 잔을 마시며 타자를 두드리고 있다. 창밖 가로수에는 은빛 전구들이 반짝이고, 그 사이로 초록과 보라, 주황과 흰색으로 부드럽게 변하는 빛의 향연이 아름답다.
카페 전체를 전세 낸 듯 나지막이 흐르는 피아노 선율을 들으며, ‘나를 위한 선물’에 대해 골몰하고 글을 써 내려가는 이 여유 자체가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다.
사실 처음에는 예정되었던 저녁 프로그램이 취소되어 아쉬운 마음이 컸다. 룸메이트마저 개인 일정이 생겨 홀로 남겨졌을 땐, 밤 산책이 조금 허전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이 혼자만의 시간을 이렇게나 밀도 있게 누리게 될 줄이야. 이 우연한 고립마저도 선물이다.
결국 삶은 그 자체로 선물이다. 살아있음을 무심히 경험하는 이 평범한 순간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숨 쉬며 마주하는 삶의 모든 장면이 오직 나를 위해 준비된 선물처럼 느껴진다.
일어나는 상황이나 현상은 내가 좌우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일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정의할지는 오직 나의 선택이다.
내가 내 삶을 '선물'로 바라보기로 선택하는 순간, 세상은 이토록 다정하게 응답해 온다는 것을 느끼는 지금 이 순간이 나를 위한 최고의 선물이다.
뭉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