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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Jul 15. 2022

 대읽다 01-김영하의 '검은 꽃'

가장 힘이 약한 나라의 가장 소외된 자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총 367쪽.

어제 오후에 시작했는데 오늘 오후까지 단숨에 읽었다.

오늘 오전에는 숙명적인 밥벌이에 매진해야 했으니,

오전을 빼면 거의 한 나절 만에 읽은 셈이다.

참 오랜만에 푹 빠져서 읽은 소설이다.

바로 그전에 ‘보보경심’이라는 책을 몇 날 며칠에

걸쳐 250쪽쯤 읽다가 결국 포기한 것에 비하면

나에게 있어서 이 소설의 몰입감은 남달랐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는 김영하다.

부끄럽지만, 그에 대해서는  ‘알쓸신잡’이라는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정도만 기억할 정도로

나는 문학에 문외한이다.

읽고 나서 찾아보니 “너의 목소리가 들려”, “ 빛의 제국”, “ 아랑은 왜”와 같이 유명한 소설이 꽤 많았고,

그중 한, 두 편쯤은 나도 읽은 기억이 난다.


이번에 읽은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910년 한 일 합방을 전후한 구한말이고

공간적 배경은 화물선 일포드 호와

멕시코 유카탄 반도 일대이다.

1033명의 조선인들(최종적으로는 1032명)은

각기 다른 이유로 인천 제물포 항에서

멕시코 ‘에네켄 농장’으로 가는 일포드 호에 오른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1905년 2월 황성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미지의 나라 묵서가(멕시코)와

거기에서 4 에네켄 농장에서의 약속된 노동  

주어질 안락한 삶을 꿈꾼다.

여기서 등장하는 에네켄은 용설란으로 불리는데

알로에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전혀 다른 종이다.

덥고 건조한 기후에 잘 자라며, 사람 키만큼 자라고, 잎에는 큰 가시가 나있다.

이것의 줄기에서 뽑아낸 섬유는 화물선에서

사용되는 로프를 만드는 원료로

당시 화물 운송량의 증가로 에네켄은 녹색 금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후, 고생스럽던 항해 끝에

꿈에 그리던 멕시코에 도착했으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채무 노예의 상황과

떠나온 조선의 강산과는 너무도 다른

열악한 자연환경,

그리고 강도 높은 노동이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인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을 바꾸어 보고자 시도한다.

어떤 이는 지배계급에 반기를 들며 투쟁하고,

어떤 이는 빌붙고,

어떤 이는 그런 상황에서 주어지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러다 멕시코 내전과 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휘말려 하나씩 하나씩 삶이 저문다.

소설은 그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 소설은 총 3부와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각 부의 분량은 매우 편파적이다.

1부는 239쪽, 2부는 90쪽, 3부는 31쪽, 에필로그는 4쪽 정도다.

에필로그야 원래 덤이니까 그렇다 해도,

압도적인 1부에 비해 2,3부는 내용이 그리 많지 않다.


매 부마다 120쪽씩 배치해야 산술적으로 균형이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독후감을 쓰려고 다시 책을 들춰보니

등장인물의 변화를 중심으로 보면

그 배치가 수긍되었다.

특히 중요 인물 중 한 명인 이연수의 심리 변화와

더불어 본격적인 행동이 변화하는 시점이

각 부의 끝이었다.


꽤 많은 사람이 등장하고,

같은 사건을 겪지만,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간다.

누가 주인공인가 다시 생각했을 때

딱히 집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3부로 나눌 때 늘 마지막 사건을 장식한 이연수와 김이정 정도가 주요 등장인물이라 생각되었다.


이연수는 고종의 6촌이자 황족인 이종도의 장녀다.

이종도는 사대부로서 변화하는, 더 정확하게는

몰락해가는 조선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고,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파평 윤 씨 부인과 혼기가 꽉 찬 16살의 장녀 연수, 장남 진우를 데리고 일포드 호에 오른다.


여기에서 연수는 김이정을 만난다.

사고무친 고아인 김이정은 보부상에 의해 키워진다.

‘장쇠’라는 이름 외에 아무것도 받은 게 없었던

김이정은 보부상들이 잠든 틈을 타 달아나

제물포 항에 도착한다.

거기에서 만난 임오군란의 주역이었던

군인 조장윤이 그에게 김이정(金二正)이라는

7획의 이름을 지어준다.

김이정은 남달리 이해력이 좋고 영민한 청년이다.

연수와 이정은 일포드 호에서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사랑에 빠진다.


그들 사이에 권용준이 등장한다.

그는 대부호 역관의 셋째 아들이었으나

어학에 재주가 없었다.

당시 인기 언어였던 중국어를 배웠던 형들과는 달리 서양의 언어인 영어를 익힌다.

선견지명이 있었던 아버지였지만, 연행을 다녀오면서 형들과 함께 해적에게 희생된다.

갑작스럽게 많은 유산을 받게 된 권용준은 기방에서 아편을 피우며 가산을 탕진한다.


갈 곳이 없어진 그는 일포드 호에서부터

멕시코 농장에서까지 조선인들의 통역으로 일한다.

철저히 농장주의 이익을 대변하던 그는 연수에게

연정을 품게 된다.

농간을 부려 김이정을 다른 농장으로 쫓아낸 후

연수가 이정에게 얻은 아들 섭이를 낳고 키우도록 도와준다.


또 도둑 최선길과 박광수 바오로 신부,

그리고 박수무당, 궁중 악사였던 내시가

각자의 전사와 함께 현재 삶이 엮어져

또 다른 이야기의 주축을 이룬다.


그중, 박광수 바오로 신부는 간음 누명을 쓰고

일포드 호에 오른다.

그전에 최선길에게 걸려 주교에게 받은

은 십자가 목걸이를 비롯한 모든 것을 도둑맞는다.

나중에 이질에 걸린 최선길을 간호하면서

그가 자신의 은 십자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되찾으려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신부라는 정체성을 계속 버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밝혀지는 바에 의하면 그는 이전에 무당집에 팔려가 신내림을 받을 처지였다.

거기에서 도망쳐 천주교 신자들의 보호 아래

페낭에서 신학교를 마친 후, 바오로 신부가 되었다.

그는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도둑 최선길의 발고로

가톨릭 원리주의자 이그나시오 벨라스케스가

박수무당을 사교라 박해하는 것에 거칠게 맞선다.

그러나 그 후에 무병을 앓게 되고

신부였던 그는 박수무당이 되는 신내림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임오군란의 주역이었던 군인들이 있다.

김이정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던 조장윤을 비롯한 박정훈 등이다.

이들은 농장에서 투쟁할 때 주축이 되었지만,

4년이 지난 후에는 각자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산다.


조장윤은 리더십이 있는 사람으로 미국과 멕시코를 오가며 메리다 한인회를 주도한다.

박정훈은 이발사가 되어, 권용준을 피해 도망가다 중국집에 팔려간 연수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와 결혼한다. 이후 농장에 맡겨졌던 연수의 아들 섭이도

데려와 키운다.


이후 3부의 이야기는 멕시코 혁명이 주를 이룬다.

이제는 없어진 나라의 국민인 조선인들은

세계 역사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낸다.


조장윤과 김이정을 비롯한 여러 조선인들은

혁명의 갈래에서 이리저리 떠돌다

결국 과테말라 혁명에도 참여하게 된다.

300만 달러라는 거액 때문에 용병으로 참전한

남의 나라 게릴라 전에서

그들은 1916년 9월 신대한이라는 신생국을 세운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정부군의 공격을 받고 패망한다.


소설은 시종일관 그들의 삶을 멀리서 망원경으로

바라보듯 찬찬히 담담하게 담아낸다.

그들은 닥쳐온 사건에 격렬하게 감정을 앞세우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성을 냉철하게 번득이지도 않는다.

영웅담도 없고, 로맨스도 없고, 신파도 없다.

정말 닥치는 대로 산다.

그리고 때가 되면 죽는다.


아 그렇구나 그렇구나 하며

멀리서 그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크게 슬플 것도 기쁠 것도, 마냥 희망을 가질 것도

실망할 것도 없어 보인다.

독자는 담담하게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다.


마지막 장을 덮은 후, 나는 내가 무엇을 읽었는가를 자문해 보았다.


삶이다.


1905년에서 1916년 사이,

세상에서 가장 힘없는 나라의

가장 소외된 자들의 삶.


역설적이게도 가장 처절하고 가장 죽음과 가까울 때 삶의 본질은 드러난다.

국가를 비롯한 그 누구에게도

보호받을 수 없었던 그들의 삶에는

주어진 운명에 저항하는 인간의 기개와

동시에 타협하는 인간의 얄팍함,

그 가운데 스스로 성장하려는 욕구가

입체적으로 혼재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욕망의 대상이자

헌신의 대상으로서의 타인을

상황마다 달리 대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속살처럼 드러내기 싫은 삶의 면면을

따끔따끔하게 보여준다.  


나는 이런 입체적인 삶의 모습을 보면서,

지난날 오랜 시간 가슴에 품고 있었던 앙금도,

냉철하게 이성의 날을 세워 판단했던 일도

별 것 아니네, 싶었다.

그 모든 것이 삶이라는 고고히 흐르는

거대한 강물로 흘러가는 작은 도랑이지 않을까,

멀리서 보면 담담하게 그럴 수도 있었던 일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중요하고 중요했던 일들,

두 손에 꽉 잡고 있었던 일들이

마음에서 툭 떨어졌다.

그리고 내 마음은 도랑을 넘어 강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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