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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May 22. 2023

준서의 눈물

4교시의 일이었다.

“서생님 주서 우어요(선생님, 준서 울어요)”

아직 우리말이 서툰,

 다문화 아이 요한이가 다가와

심각한 표정으로 내 귀에 속삭인다.

아이들에게 보고서를 만들 종이를

나눠주느라 분주했던 손을 멈추고,

준서를 보았다.


작고 동그란 머리통에

하얀 정수리 가마가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숙이고 통통하고 짧은 팔을

 문지르며 연신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준서에게 다가가 물었다.


 “준서야, 무슨 일이야? 왜 그래?”

 “……”

얕게 흐느끼느라 말이 뭉개져서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 옆에 앉은 요한이가 다시 내 귀에 대고

“주서 우어서요(준서 계속 울었어요)”한다.


그러고 보니 3교시 쉬는 시간에도 준서는 울었다.

그때는 자기가 친구들 노는 것을 보고만 있었는데

친구들이 자기에게 자꾸 화낸다고 했다.

감정이 북받친 준서에게 화장실에

가서 세수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라고 보내고,

내가 옆에 있던 아이들에게 사정을 알아보았다.


아이들은 교실 뒤편에서

다리 찢기를 하고 있었는데

(솔직히 나는 그게 왜 재미있는지 모르겠지만,

2학년 아이들에게 그건 꽤 재미있는 놀이로 유행 중이다.)

준서가 서 있어서 자리 좀 비키라고 했는데

울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들은

자기들의 놀이가 나의 진상조사 때문에

방해되어 그런지 꽤 기분이 나쁜 표정이었다.


혹시 그 후 아이들이 또 뭐라 했나?


준서는 잘 운다.

친구들과 놀다가도 울고,

공부하다가도 울고, 가끔은 청소하다가,

혹은 손을 씻다가도,

때로는 이동하기 위해 줄 서다가도,

밥 먹다가도 운다.

울 때는 굉장히 서러워하면서

감정이 북받쳐 있어 말을 잘 못하거니와

말을 해도 소리가 뭉개져 그 이유를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보고서를 쓰라고 하고,

여전히 울고 있는 준서를 데리고

잠시 복도로 나갔다.

조용한 곳에서 다시 부드럽게 물었다.

“준서야, 무슨 일 있어?”

 “…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 친구들과 다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구나,

다행이다.

그러나 이걸 모르겠다고?  


순간 당황스러웠다.


여러 가지 종류의 집과

여러 형태의 가족을 알아보고

, 그중 내가 어떤 집에서,

가족 구성원 누구와 사는지,

우리 가족은 어떤 특징이 있는지 등을

 간단히 소개하는 <우리 가족 보고서>를

만드는 시간이었다.


 바로 전 시간, 그러니까 3교시 꼬박

 ‘나는 어떤 모양의 집에 살고 있나요?’라는

발문을 필두로

각자에게 생각해 볼 시간을 주고,

이어 책의 그림을 보고 짝과 이야기 나누고,

집의 모양에 따른 종류를 설명하는 동영상을 보고

내용을 정리하며 자신이 사는 집을 발표했다.


더 이상 뭘 더 어떻게 하지?


도저히 모르기가 더 어려울 것 같은데

뭘 모른다고 하는 걸까?

이번 주제 수업 중에서 난이도가 낮은 편이라

아이들이 못할 거라 예상하지 못했고,

어제까지 5개 반을 수업하면서

못하는 아이가 없었다.

심지어 일본인 어머니와 일본에서 살다가

아빠 나라인 우리나라에 온 지

6개월 남짓 된 요한이도

별 무리 없이 하고 있지 않은가?


오만가지 질문이 전광석화처럼 내 머리를 스쳐갔다.


그러나 정작 준서는 모른다.

그리고 나는 준서가 뭘 모르겠는지 모른다.


 이 두 가지는 현실이다.


이런 경우, 예전에 경험이 없을 때는

지난 시간 했던 것을 모른다는 아이에게

빠르게 다시 반복 설명했다.

편안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하고 싶지만,

이미 교사인 내 마음에도 ‘이걸 모른다고?’하는

의구심이 가득해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설명을 듣는 아이가 준서처럼 기질이 보드라울 때는

교사 목소리가 딱딱해져 있음에 기부터 죽었다.

결국, 자신이 아는지 모르는지

 메타인지를 발달시켜 탐색하기보다

 분위기에 눌려 더 이상 모르겠다는 말을

못 하고 넘어가곤 했다.


이런 경우가 생각나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준서의 자리로 같이 가서

준서가 뭘 모르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준서야, 준서는 어디에 살아?”

 “모한 저다음 아파트요.”

 “그래? 그건 어떤 모양이야?”

 “네모요”

  “그렇구나. 그런데 네모 안에 준서네 집만 있어?

아니면 여러 집들이 딱 붙어서 모여있어?”

“여러 집들이 딱 붙어 모여있어요.”

“음 그럼, 준서네와 같은 집을 아파트라고 하네.

만약 집 하나만 있으면 뭐라고 부를까?”

 “주택이요.”

“맞아, 그걸 단독주택이라고 해.”

 이런 식의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런데 준서는 수업의 흐름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도대체 뭘 모른다는 거지?


그러다 준서가

“선생님, 그건 아는데요.어디다 쓰는지 모르겠어요.”

엥? 이건 또 무슨 말이지?

그때부터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준서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준서는

첫째, 내가 보고서를 쓰라고 준 A4를 가로로 하는지

세로로 하는지 모르겠고,  

둘째, ‘우리 가족 보고서’라는 제목을

종이의 어디쯤에 써야 할지 모르겠고,

마지막으로 우리 집은 아파트입니다.

우리 가족은 아빠, 엄마, 나, 동생입니다.

우리 가족은 행복하고, 서로 사랑합니다.

등과 같은 설명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이었다.

물론 나는 좀 전 3교시에 다 설명했다.

그것도 칠판에 보고서 예시를 그려가면서.


저학년 아이들 중에 간혹 준서와 같은

아이들이 있다.

교사가 멀리서 전체적으로 하는 설명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다가가서 개인적으로 설명하면 이해한다.

준서도 칠판에 내가 예시로 그렸던 보고서를

한 부분씩 가리키며 보고서로

 쓸 종이의 위치를 짚어주자

곧 천천히 ‘우리 가족 보고서’라고 쓰기 시작했다.


왜 이럴까?

아직 이와 관련된 문헌을 찾아보진 못했고,

이와 관련된 이론을 들어본 적은 없다.

다만, 경험적으로 나는

아이들이 집중할 수 있는 거리도 성장하면서

늘어나는 것은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즉, 신생아 때는 바로 눈앞에 있는

 모빌에만 반응하다가

 점점 월령이 증가하면서 아기는

1~2M 거리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인식해

 낯을 가리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렇게 물리적으로 시력이 발달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진 않는 이해력도 그렇게 발달하는

것은 아닐까?


저학년 아이들도 물리적으로 볼 수는 있지만,

자신의 맥락으로 가져와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지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인식하고,

주위를 인식하고, 시간을 인식하는 데에

점점 더 넓어지고 깊어지는 과정을 거친다.

심지어 세계 4대 성인들은

그 범위가 초아와 우주와 영원에 치닫는다.

그렇게 될 수 있든 없든,

일단 모든 사람은 자기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는 상황을 인식하고,

그다음은 조금 더 떨어져 있는 상황을 인식하고

그렇게 그렇게 성장해 간다.

그러나, 그 과정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준서는 다른 아이들보다

그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야 하고,

직접적이어야  한다.

준서에게 교실에서 일어나는 상황은

멀어서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답답하다.

답답한데 마음이 여려서 눈물로 말한다.


그렇게 보면 쉬는 시간에 있었던 일도 이해가 된다.

친구들이 노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있는데

자기가 비켜야 친구들이 놀 수 있다는

상황을 인식하지 못했다.

친구들은 준서에게 비키라고 거의 동시에

소리치듯 이야기했고,

준서는 아이들 행동에 이유를 모르기에

아이들이 자기에게 화낸 것으로 느꼈다.

만약 아까 놀던 친구들 중에

누나 같은 아이가 있어서

준서에게 자리를 가리키며 저기로 가서

구경하라고 했다면?

마음 여리고 착한 준서는 그렇게 했을 테지.


수업 말미, 준서는 최선을 다해 보고서를 완성했다.

자신의 차례가 되어 천천히 그러나 큰 목소리로

자신의 보고서를 발표하고, 친구들의 박수를 받았다.  

다소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친구들을 둘러보는 준서의 입꼬리는

살짝 말려 올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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