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입춘 추위가 조금씩 가시면 여기저기 봄의 징후가 나타난다.
겨우내 헐벗었던 나무엔 푸르스름한 순이 돋는다. 연한 갈색과 회색이었던 나무와 풀이 푸른색을 봄을 맞아 조금씩 밀어 올리는 장면은 적어도 수 만년, 아니 수 백, 수 천만년 전부터 이어지던 일이다.
태양이 지구에 보내는 것은 빛과 태양풍이라 부르는 방사능을 띤 알갱이들이다. 다행히 지구는 자전을 하고 있고 내부의 금속성분 덕분에 지구 자체가 자기장을 띄고 있어 대부분의 태양풍을 막아준다. 그러고 나서 조금 남은 흔적이 극지방 가까이에서는 오로라로 나타나 인간의 눈을 잠시 즐겁게 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남은 빛은 지구 위 거의 모든 생명체에 생명의 근원이 된다. 서양이 좋아하는 환원주의의 눈으로 보자면 녹색 식물의 엽록소가 물에서 수소이온을 떼어내서 자신이 들이마신 이산화탄소에 붙여 포도당을 만드는 아주 간단해 보이는 과정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햇빛이 들지 않는 깊은 바닷속이나 태고적부터 어두웠던 깊은 동굴에 사는 아직 다 알려지지 않는 생명체들을 빼면 거의 모두가 이 두 줄짜리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과정에 목숨을 기대는 것이다.
좀 더 환원주의적으로 가보자
태양에서는 그 깊은 곳에서 수소라는 우주에서 가장 가벼운 원소가 두 번째로 가벼운 헬륨이라는 원소로 바뀌고 그 부산물로 빛을 만들어낸다. 이 빛은 약 2천만 년 동안 태양내부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다 마침내 겉껍질을 뚫고 나오면 햇빛이 되어 약 8분여 뒤에 지구의 우리에게 닿는다.
영겁의 시간 같은 2천만 년과 8분의 차이는 우주와 우주의 한 점 같은 지구의 처지를 말해준다. 지구 위에서 인류의 문명이 발생한 것이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 해도 1만 년은 커녕 수 천년 정도 이상 된 것이 없다. 그때 태양에서 만들어진 빛은 또 몇 천만년이 지나야 지구에 올 것이다. 빛 알갱이에 번호표를 붙인다면 지금 인류는 그 번호를 확인해 볼 수 도 없다. 인류는 하늘로 대표되는 우주와 땅에서 느끼는 대자연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존재일 테다.
하지만 몇 백 년 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인류는 과학이라는 우주를 볼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 올 수 있었다. 이 도구는 우주뿐만 아니라 인간 본연의 본성과 양심까지 조종할 수 있어서 때로는 전쟁의 수단이 되기도 하고 인간의 여러 고민거리와 욕망을 해결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자신을 살리는 빛에 매료된 인간은 우연히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 불을 발견했고 그 불을 더 세게 하는 온갖 것들을 만들어냈다. 음식을 익혀먹기도 하고 어두운 밤의 공포를 몰아내는데 쓰이기도 했으나 자신이 미워하는 것을 태워버리고 파괴하는데 쓰기도 했다. 지식이란 것은 세상을 짓기도 하고 허물기도 한다는 점을 알았기에 모여사는 인간 사회를 위해 이런저런 규칙과 약속을 만들고 문명을 만들어냈다. 만드는 데는 수 천 수 만년이 걸리는데 부수는 데는 8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어쩌면 이 차이가 인간에게는 불편한 느낌과 양심의 자각을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고학자들은 이젠 사라진 옛 문명을 찾는다. 사라진 것을 추억하기 위한 작업이 아니라 현재의 인류가 가르침을 얻기 위한 일이다, 과학자들은 아직 오지 않는 미래의 문명을 예측한다. 이 또한 막연한 추측이나 예상이 아니라 현재의 인간을 위한 것이다.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우리는 불안하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 빛에 매료된 인간들은 그 성질을 연구하다가 마침내 핵무기까지 만들어내게 된다.
태양보다 몇 천 배 밝은 빛을 찾았으나 그 결과는 건설보다 파괴를 위한 길이 되었다.
식물이 양분을 만들기 위해 빛을 이용하는 과정은 지금 알려진 것으로도 아주 복잡하다. 온갖 물질이 수많은 과정을 거쳐서 쓰이고 시간이 걸리는데 그 결과는 태양에서 빛을 만들어내는 수소 이온 (양성자라고 불러도 된다)을 지구 위에서 다시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식물의 심장에 하는 일은 1억 5천만 km 떨어진 태양의 심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주 천천히 수많은 이웃과 나눠서 재생하는 것이다. 내가 딛고 사는 대지의 작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온통 인간을 먹이고 살리는 태양을 다시 재현하는 것임을 기억한다면 이 세상을 좀 더 소중히 여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흔히 하는 말이 세상은 다 연결되어 있다고 하지만 과학의 눈으로 봐도 이 우주와 태양과 지구와 인간은 다 연결되어 있다. 잠깐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조급한 마음으로 이 연결을 끊다 보면 다른 것은 다 제 자리에 있지만 인간은 자리가 없어진다.
인간의 본질은 이 연결에 있기 때문이다.
20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