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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종호 Jan 08. 2024

3. 김지섭, 마등령, <도리포 가는 길, 글밭>

벌써 오래 전 언젠가 술자리에서

그가 대학시절에 넘었다던 마등령

그날부터 그 마등령이 내 가슴 한 녘에

전설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그 뒤 두 번이나 대청봉을 올랐지만

마등령은 끝내 나를 불러주지 않았다.

아니 그 해 여름 신새벽의 영시암에서

퍼붓던 장대비로 하산한 뒤

마등령은 정말 신선들만 살게 되었다.

아니 지금 힘겨운 오십령을 넘어

절룩거리며 어찌 가까스로 마등령을 넘는다 해도

그건 그냥 꼬박 하룻길에 넘어야 하는

까다로운 설악 등반길의 하나일 뿐

이제 나는 꿈같은 그의 시절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남녘 꽃 소식은 봄바람에 실려와

우리집 앞뜰에서 흐드러지게 피었다가는

그것이 소백을 거슬러 백두대간의 등을 타고

설악을 치달아 오르면서

마등령에도 철늦은 봄꽃으로 피어나면

내 한 해는 또 속절없이 저물고 말리라.     

     

시인은 언젠가 누군가에서 들었던 ‘마등령’에 가고 싶었습니다. 가려고 시도도 했으나 예상치 못한 장대비에 포기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제 마등령에 오른다 해도 옛날 젊은 시절 그렇게 오르고자 했던 마등령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마등령은 마음에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이제 갈 수는 없지만, ‘우리 집 앞뜰에서 흐드러지게 피었다 가는’ ‘남녘 꽃 소식’이 ‘봄바람에 실려 와’ ‘그것이 소백을 거슬러 백두대간의 등을 타고/ 설악을 치달아 오르면서/ 마등령에도 철 늦은 봄꽃으로 피어나면’ 좋겠다는 간절한 염원은 뜨거운 가슴 속에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시집을 보면 시인은 70 중반을 넘긴 것으로 보입니다. 뜨거운 희망과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장대비’와 같은 숙명적 요인을 가만히 수용하는 달관의 경지에 있습니다. 이룰 수 없는 젊은 한 때의 희망을 놓고는 있지만, 그래도 내가 희망했던 그곳에 나는 가지 못하고, ‘내 한 해는 또 속절없이 저물고 말리라’는 서글픔 속에서도 내 집 앞 꽃을 흐드러지게 피게 하는 남녘의 바람이 마등령에 도달하기를 바랍니다.     


김시인이 아쉬워하는 마등령이 꼭 산봉우리만의 이름이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사랑이고 우정이고 사업이고, 또 그 밖에 무엇일 수 있겠습니다. 희망, 좌절, 아쉬움과 그리움, 체념과 달관으로 이어지는 것이 우리 삶이 아닐까요? 시인은 삶과 죽음을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다른 시 ‘산’에서 보면, ‘나를 까마득한 정상으로 밀어 올렸던’ ‘젊은 날의 산기슭은’ 언제부턴가 ‘차츰 키를 낮추다가’ ‘어스름이 깔리는 어느 먼 날엔/ 산은 더욱 낮아지고 편안해져/ 그 능선은 늙은 초가지붕처럼 아늑해’ 져 ‘거기 누워 아주 편안하게 누워 잠들’ 수 있는 곳이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삶을 관조할 수 있는 것은 자연적인 연령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인격과 시의 품격이 농익어서 가능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을 안동에서 ‘틈틈이 농사지으며 가을 들녘에서 낙조를 벗 삼아 살고 있는’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 편의 시에서 과거와 현재, 이상과 현실, 젊음과 늙음, 삶의 태도와 죽음의 응시를 동시에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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