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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종호 Jan 10. 2024

4. 박석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

박석준의 시 읽기는 참 불편하다. 불편하다는 말은 나쁘다, 불쾌하다는 뜻이 아니라 편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우선 그의 삶이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그의 삶을 알고 나면 그저 먹먹해진다. 나는 그와 같은 갑장으로 동일한 시대를 살아왔다. 그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삶을 살았고 정치적으로 암울한 시대를 몸으로 부닥치며 살았다. 다만 다른 것은 이런 상황이 내게는 약간은 간접적이며, 지켜보는 상황이었다면 박석준에게는 암울한 유신과 전두환 일당의 신군부가 일으킨 정치적 광풍이 그의 가정을 강타했고, 가족의 삶을 파괴하였으며, 따라서 시인 박석준의 삶을 평생 옭아매는 족쇄의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집안의 기둥이 될 것으로 기대했던 똑똑하고 잘난 두 형의 남민전 사건 투옥, 아버지의 죽음, 자연스럽게 이어진 어머니의 병고와 누나의 가난이 그의 삶을 짓누르고, 먹고살기 위해서 그는 안기부에 각서를 쓰고 교사가 된다.    

  

“1958년생 광주 계림동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2학년 때 집안의 파산, 대학교 1학년 때 남민전 사건에 관련된 형들의 수감, 너무 가볍고 허약한 몸으로 돈을 벌어야 했다. 형들 사건 때문에 1983년에 안기부에서 각서를 쓰고 교사가 되었는데. 1989년 전교조 결성을 위해 해직을 선택했다. 1994년 복직하고 인생을 생각하다 (시인인 되었고) 빚을 다 갚고 60세에 명예  퇴직했다.” 시집의 표 2에 있는 자기소개이다.   

   

박석준의 시편들은 시인의 삶의 이력과 우울을 그대로 드러낸다. 감옥에 갔다 나온 형들의 이야기, 아버지의 죽음, 1980년 광주와 6월 항쟁 당시의 현장과 현장에서 만났다 죽은 동네 친구, 후배들 이야기, 열사가 된 제자, 일베와 같은 인식을 하는 자녀를 둔 어른이 된 제자들과의 만남, “가난하여 아파트 경비원 일을 하고 쓰러져/ 뇌졸중으로 의식 없이 5년 반을 살아간”(‘간월도’) 형의 인생과 시간강사인 동생이 사는 만화방 같은 집과 오십육 센티의 허리를 가진 시인(‘우산과 양복’)이 마음과 시공간의 잔상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면서 읽는 이의 속을 후벼 파고 마음을 시끄럽게 하며 불편하게 한다. 등장한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들이 정리되고 남은 것은 오직 자본주의의 승리, 환호하는 도시 속의 우울한 이미지가 그를 지배한다. 4월에 이 시집을 처음 읽고, 몇 번 읽고 그리고 오랫동안 책을 덮은 이유이다.      


박석준의 시집이 어렵고 불편한 두 번째 이유는 시에 대한 고정관념의 전복성 때문이다. 그의 시에는 시의 정형성이라든가, 운율이라든가 서정이라든가 상징이나 은유라는 것이 없다. 개인의 삶에서 끌어내는 시대적인 서사가 주류를 이루고 서사의 진술에도 불친절한 군데군데 비약이 많아 뜻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시를 쓰지 않으면 살아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는 릴케의 준엄한 말이 그를 지배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삶을 체감적으로 알지 못하고 개인적인 친분이 없는 독자 입장에서는 시 한 편 한 편을 따라가기가 벅찰 정도이다. 평탄치 않은 그의 삶이 시의 형식을 전복해 버린, 아니 시의 기존의 형식을 전복해 버리지 않고서는 그의 삶을 표현할 수 없어서라고 이해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시들을 필사적으로 썼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이 시집이 시로 쓰는 자서전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시가 무엇인가, 시의 대상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규정하기 전에 시인의 어떤 시든지 시는 시인의 자전적 의미를 가진다. 그의 삶과 가치관과 미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하필 시집 제목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인가? 개인의 비극적 삶을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 세계관에 담았다는 뜻인가? 내가 쇼펜하우어를 이해하고 있는 바로는, 개인이 인식하고 부닥치는 세계'가 바로 '표상으로서의 세계'이고, 세계에 대한 개인의 스탠스와 욕망체계가 '의지로서의 세계'이다. 서두의 ‘시인의 말’에서 ‘의지’와 ‘표상’을 유추해 보면,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 ‘시인으로서 말을 섬세하게 하려는 것’, 말을 거는 것, 간섭하고 관여하고 싶은 것이 그의 ‘의지’이고 그가 마주하는 고통과 표상의 세계는 ‘많은 돈과 새 문화가 빠르게 굴러가는 세계와 (자본주의적) 도시’가 아닐까? 그래서 그는 ‘꽃나무가 주는 자극보다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 더 짙은 마음’을 쏟고 싶은 것이다.     

그가 시집 제목으로 삼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에서 한 부분을 읽어본다.     

 

(전략)

"산다고 마음먹으세요. 내일 낮에 수술을 할 겁니다. “

순환기 내과 장의사가 말하고 간 후, 이상하게도

유리창이 출판하지도 않은 시집 ‘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를 공간에 그려낸다. 

‘심실중격에 구멍이 다시 생겨서 피가 새고 

심장병과 동맥경화가 깊어요. 

수술 성공할 확률은 1 프롭니다. 

밥 거르지 말고’     

(중략)

63살 2020년 2월로 온 나는 삶이 저지른 죄가 있지만,

사람의 소리. 시이면 좋겠다. 내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     


고통의 삶의 긴 터널을 통과하고도 맞부딪힌 죽을 가능성이 높은 막다른 수술 현장이 그의 ‘표상의 세계’라면 ‘63살 2020년 2월로 온 나는 삶이 저지른 죄가 있지만,/사람의 소리. 시이면 좋겠다. 내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처럼 누군가에게 사람의 소리, 시가 되면 좋겠다는 것이 그가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려 표현하고 하는 ‘의지의 세계’가 아닐까?      


꽃을 노래하고 영탄과 가벼운 말놀이와 도덕적인 잠언을 담은 짧을 글을 시라고 대부분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오늘날, ‘꽃나무가 주는 자극보다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 더 짙은 마음’을 보여주는 그의 시집에 유일하게 있는 꽃이 목련꽃인데, 그의 ‘목련꽃’에서도 다른 시인들이 보고 표현하는 방식 하고는 매우 특이하게 꽃을 표현하고 있다.        

  

사람들이 찾아오긴 해도 말을 걸어오진 않았다.

어쩌다가 간혹 두 사람이 말을 남기고 갔을 뿐.

내가 무서워서일까?

내가 힘없는 잎을 달고 있어서 그럴까!     

사람들은 사람 생각, 일 생각을 주로 하면서

산책에 잠긴다.

그러다가 피곤해져 고개를 돌렸을 때

봄 나무들 속에

홀로 떨어져 하얗게 꽃을 피운 나무의 꽃을

아름답다고 한다. 잠시 후엔 애절하다고 한다.

  _<목련꽃> 전문     


역경의 삶을 뚫고 살아난 시인과 그의 시에 경의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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