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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종호 Jan 11. 2024

5. 합동시집 <그때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그때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는 작은숲출판사에서 시집을 낸 별로 알려지지 않은 늙수그레한 시인들의 합동시집이다. 앤솔로지라고도 할 수 없고, 동인지라고도 할 수 없는, 그냥 한 출판사에서 시집을 낸 시인들의 합동시집이다. 굳이 공통점을 찾는다면 대부분 학교 밥을 먹었다는 것, 평화와 생태를 위한 노래를 함께 부른다는 것쯤. 그야말로 나이도 어느덧 초로에 접어들어 눈썹이 희어지고, 각자 살고 있는 지역에서 시를 쓰면서 살고 있다. 김정원(전남 담양), 송창섭(경남 삼천포), 박우현(대구), 전종호(경기도파주), 박용주(충남공주), 전인(충남계룡), 임덕연(경기남양주), 조재도(충남천안), 신탁균(충남아산), 나종입(전남나주). 남도의 끝에서 접경지역 파주에 이르기까지 주소지만 본다면 가히 전국적이라 할 수 있다.  

   

작은숲출판사는 ‘청소년과 평화’를 지향하는 1인 출판사로, 영세 업체지만 돈보다는 뜻을 중시한다. 10여 년 동안 돈도 안되는 시집을 ‘사십 편 시집’이라는 이름으로 40여 권을 냈다. 그럼 왜 사 십 편인가? 민족 암흑기인 1940년대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의 감옥에서 순국한 이육사시인이 평생 남긴 시가 37편이니, <청포도>,<광야>, <절정> 같은 작품처럼 시인의 시 세계를 드러내는데 40편이면 족하다는 의미이다.     


편집책임자인 조재도 시인의 말처럼 “‘따로또같이’의 실천결과가 이 합동시집이라 할 수있다. 각자 처해있는 곳에서 시라는 이마 위 ‘별’을 함께 바라보며 각자의 걸음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다. 시로 만나고 시로 교류하고 시의 길을 함께 걷는 늘그막 인생의 도반들이다. 그런 면에서 우린 ‘우리 식대로’ 살고 우리 식대로 시를 쓰고 우리 식대로 마음을 나눈다. 원래 예술(시)의 본령이 ‘자기 식대로’ 아닌가? 자기 식대로 고투하고 추구한 결과 생기는 무늬가 어쩌면 그게 ‘사십편시선’이라는 생각이다. 젊은 시절을 격정의 세월에 흘려보내고, 시골 변방에 파묻혀 청탁은커녕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혼자만의 시 쓰기 작업을 우린 이런 식으로라도 서로 확인하고 위안해 보자는 것이다.”  시집의 제목은 박우현의 시 <어쩌다 그때 그곳에 바람이 불었을까>에서 따왔다.     

어쩌다 그때 그곳에 바람이 불었을까     

새벽에 눈 떠져 문득 생각해보니 

그때가 가장 아름다운 한순간이었어 

그때가 또한 생生의 한 절정이었어     

우리가 그 길을 그때 우연히 걸어갔고 

때마침 바람이 불었고

수백의 은행잎이 노란 눈송이처럼 마구 흩날렸을 때      

누구는 춤을 추고

누구는 두 손을 하늘로 올리며 감탄사를 내뱉고 

누구는 순간을 찍고

앞서가던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지 

손으로 입을 가렸고 눈은 더 커졌지     

다음날 누가 청소를 했는지 길은 깨끗해져 버렸지

노란 나비 한 마리 없었지

사진 한 장 남기고 그 사건은 사라져 버렸지 

철학에서는 이것을 시뮬라크르*라고 말한다지     

우리 추억의 수첩엔 이렇게 기록되리니 

그토록 아름다운

이따금 사무치게 그리운 

순간적인 

덧없는……          


*시뮬라크르 : 순간적으로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는 우주의 모든 사건.  

자기동일성이 없는 복제를 가리키는 철학개념. 플라톤은 이런 사건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긴 반면 들뢰즈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김.  

   

시인에게 포착된 한 순간의 감정, 생각이 시라는 것이다. 어찌 시만 그런 것이랴! 그때 한 순간이 누구에게는 한 평생이 되고, 인생의 대서사가 되는 것을. 한 순간 고향을 떠나 이주민으로 한 평생을 뜬풀처럼 살다 간 이도 있으니.         

 

죽어서야 겨우 지상에 지번地番 하나 얻었다

내 곤고하고 비루한 이승의 삶은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곳 많은 장돌뱅이처럼

아니 때로는 진짜 장돌뱅이로 떠도는 일이었다     

젊은 시절 무턱대고 강의 상류를 떠난 뒤

어디 중간에서 한 번도 나루에 닿지 못하고

분단의 강을 정처 없이 헤매며

아는 이 하나 없는 막장의 하류로 흘러왔구나     

북쪽에서 임진강을 건너 남쪽으로

남쪽에서도 강원도에서 전라도로 충청도로

머리 둘 곳 없어 철새처럼 이곳저곳 떠돌아

남의집살이 처가살이 안 해 본 것 없이

유랑流浪이 인생의 유일한 경력이 되었다     

죽어서도 하늘로 승천도 역류도 할 수 없어

평생 이바지하며 살던 처가 묘지 옆에 묻혀

겨울 지나면 봄마다 무덤은 시퍼런 서릿발로 들떠

한줌 잔디는 뿌리박지 못하고 이끼가 천지인데

험한 세상에 깜냥 없이 나간 어린 새끼들은

이리저리 들리고 이 이 저 이에게 휩쓸리지 않고

지상에 작은 자리 하나 얻어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내 걸어온 길옆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은 모두 

세상의 번듯한 사람들을 위한 헌사였을 뿐

그 흔한 꽃 한 송이도 내 것이 되지 못했으나

뿌리 뽑혀 떠도는 삶의 연대기를 끝내고

내 아이들의 길에도 꽃 한 송이 피어날 수 있을까

모두가 들뜬 봄밤에 죽어서도 나 혼자서 잠 못 들고 있네

               - 전종호, 임진강 22 지상의 지번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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