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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종호 Jan 14. 2024

8. 조재도, ‘해 두덩이’, <산, b>

폭설 내린 아침 

늙은 호박 두 쪽으로 쫙 갈라

가방에 밀어 넣고 산에 간다     


이런 날 새들은 아무것도 먹을 게 없지

산토끼 고라니는 쫄쫄 굶어

양지바른 곳 눈더미 헤치고

늙은 호박 통째로 놓아준다     

흰 눈밭에 솟은 붉은 해 두덩이


나는 나무 뒤 숨어 엿보고

이윽고 큰 새 작은 새 몰려들어

호박 속 쪼아 먹는다

태양의 살점 맛있게 쫀다

     

가슴에 뜨는

오호, 붉은 해 두 덩이     


호박을 반으로 갈라서 메고 가 눈 덮여 먹을 것이 없는 산짐승들을 위해 먹이를 제공하는 시인의 마음이 따뜻합니다. 반으로 나뉜 호박 두 덩이를 생명의 근원인 해와 연관 짓는 것만이 이 시의 상상력의 특징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가 가볍지 않은 것은 생명에 대한 시인의 특별한 관심 때문일 것입니다. 쫄쫄 굶는 새와 산토끼와 고라니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시작해서 산토끼와 고라니와, 나무 뒤에 숨어 엿보는 시인까지 모두 태양의 자식임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가슴에 뜨는/오호, 붉은 해 두 덩이’가 될 수 있습니다.     


조재도 시인은 젊어 민중교육지로 한 번, 전교조 사태로 또 한 번, 두 번이나 해직된 교사 시인입니다. 이제 정부에 의한 강제 해직이 아니라 스스로 직을 벗고 자연의 곁으로 돌아가 조용한 목소리로 산을 빗대어 삶을 읊조리는 시인이 되었습니다. 13권의 시집 뒤의 이 시집 <산>은 태백준령이나 히말라야 같은 높은 산이 아니라 자기 집 뒤의 태조산을 매일같이 오르면서 산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모습을 각 부로 구성하여, 구체적이고 미시적으로 관찰하면서 얻은 삶의 통찰로 적은 짧지만 깊은 시로 이루어졌습니다.      


바람만 남은 산     


상처 입은 짐승처럼

웅크린 산     


빈 산


끝났구나 싶을 때의

인생 같은 산

  - 빈 산     


은자요 현자의 풍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회 부조리에 대한 저항이 가라앉고 깊은 샘물에서 길어 올리는 삶의 지혜가 넘실거립니다. 부조리에 대한 저항,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으로부터 이제 전환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생명’에 대한 탐구입니다. 자본주의적 삶의 원리와 질서는 반생명적 이익 추구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개발 때문에, 또는 대설 때문에 먹이를 찾을 수 없는 산짐승들이 사람의 마을을 침범하기 시작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새벽 닭장에서 마주친 고라니의 눈빛이 너무나 처연해 내 가슴이 서늘해져서 고라니에게 사과의 편지를 쓴 적이 내게도 있었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데

산과 물 애써 구별할 필요도 없이

자연은 모두 인간의 것이라는 듯

포클레인이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자 

아랫마을에 내려온 고라니 몇 마리 

개에게 쫓겨 늪으로 달아나고 있다

물을 찾는 것인지 풀을 찾는 것인지

어미 아비 형제를 찾아온 것인지

새벽 닭장 앞에서 마주친 새끼 고라니 

눈에는 울음이 한가득이었다

세상에 나서 죄라고는 한 번도 

지어 보지 못한 맑은 물빛

갓난아이의 순한 초식 눈빛이었다

 - 졸 시, 고라니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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