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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종호 Jan 13. 2024

7. 양석, 잡부, <행복증후군, ㅎㅅ>

신새벽, 찬 어둠을 달려온 오거리 인력시장에서는

먼저 온 타국의 낯선 얼굴과 낯선 언어들이 넘쳐났다

편의점과 물류센터 고시원을 전전하다

종내 이곳에 이르러

그들의 등 뒤에서 멈칫대는 나는 외려 먼 타인이었다  

   

뿌리를 내리기 위해 젊은 시간을 삭혀

스스로 거름이 되고자 찾아들었던 고시원

정작 나의 시간들은 책상 위에 올려놓은 정규직 꿈을 

담보로 

편의점에 묶여 있었다     


살기 위해 물류창고를 지고 날랐던 수백 날들

무너진 두 어깨에

또 다른 물류창고의 무게로 노동을 얹는다

단 하루를 위한     

아직 남은 몸을 삭혀

뿌리를 내리기 원하는 나는 이제 잡부

하루 종일 땀 흘려도 내일은 알 수 없는

맨몸으로 남은 수명까지 당겨써야 하는  

   

누군가 불러줄 때까지

막연한 기다림으로 잡부의 하루

봉고차가 드문드문

어디론가 사람을 싣고 갔다     


메마른 햇살이 발끝을 짓누르자

사람들은 하품처럼 한숨을 토해냈다

그늘진 기다림 끝에 선택받지 못한 발걸음이

오거리에서 신호등처럼 서 있다     


시인은 잡부입니다. 잡부의 눈으로 자본주의의 맨 밑바닥 인력시장 생태계를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이미 한국 시장은 글로벌화 되어 있어 낯도 말도 낯선 외국인 노동자들과 경쟁해야 합니다. 편의점, 고시원, 물류센터, 대리기사, 기간제 교사를 전전하다 남이 불러줘야 일이 생기는 인력시장에 와 있습니다. “아직 남은 몸을 삭혀/ 뿌리를 내리기 원하는 나는 이제 잡부/ 하루종일 땀 흘려도 내일은 알 수 없는/ 맨몸으로 남은 수명까지 당겨써야 하는// 누군가 불러줄 때까지/ 막연한 기다림으로 잡부의 하루/” 인력시장에서라도 뿌리를 내려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지려고 하지만 “그늘진 기다림 끝에 선택받지 못한 발걸음이/ 오거리에서 신호등처럼 서 있”는 경우가 자주 발생합니다.     


그의 시에는 현대의 플랫폼노동의 문제가 자주 등장합니다. 노동의 현실을 고발한다는 의미보다는 지금 플랫폼노동의 현실에 끼어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 끼어 있는 현실에서 그는 가능하면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현실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적요의 시간>에서는 대리기사의 눈으로, <커피처럼>에서는 커피 종업원의 눈으로 세상의 모순과 슬픔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일하고 돈을 벌어도 '매달 결제해도/ 매달 청구되는 신용카드 고지서'는 <시지포스의 바위처럼> 힘겹습니다.   

  

그의 시에는 언어적 함축성이나 이미지나 은유의 놀이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일상의 언어로 우리가 부닥치는 일상의 세계를 거의 직설적으로 진솔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의 시의 아름다움은 말이나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를 읽고 우리 안에 자리 잡는 묘한 아픔의 정서 속에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시는 예술이기에 앞서 구원입니다. 시가 사회를 구원한다는 의미의 구원이 아니라, 시를 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래서 그가 처한 삶의 아픔을 치료해 간다는 의미에서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교사였습니다. 목돈이 들어가는 다운증후군 딸의 치료를 위해 교직을 퇴직하고 생활을 위해 비정규직 플랫폼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비바람 부는 현실에서 그는 쓰지 않으면 살아가는 것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시는 그의 삶의 증언이자 구원의 방편입니다. 그의 시를 읽기 위해서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할 수 있는 따뜻한 가슴과 뜨거운 심장이 있으면 됩니다. 그는 '행복증후군' 딸을 위해서 살아가는 씩씩한 행복한 아빠입니다.          

나의 기쁨/너는//키는 자라도 마음은 그대로인/열일곱 살이어도 일곱 살인//숨 쉬는 것부터가 감동이었던 일상/변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진/머리가 하얗도록 동심을 소유할 너는//우중충한 먹구름 속에서/빼꼼 내민 햇살을 당겨와/환하게 펼쳐 놓는 신기한 증후군//낯섦과 편견이 만든 경계를/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마법처럼 허물어 버리는 당당한 증후군//작은 것에도/크게 감사하는 행복한 증후군//그 속에서/천국을 본다/ 양석, <행복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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