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의 탐구 2
나잇살이나 먹어 동네북이 된 적이 있었다. 알다시피 동네북의 본래 의미는 동네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북처럼 아무나 꺼내 두들겨댄다는 의미에서 여러 사람이 두루 건드리거나 만만하게 보는 사람을 지칭하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왕따가 소극적 의미의 집단적 배제 현상이라면 동네북은 한 사람에 대한 여러 사람의 적극적 공격을 말한다. 특징은 공격의 이유가 대개 모호하거나 비합리적이고 말(언어)이라는 공격 수단에 의해 이성의 논리가 아니라 말 잘하는 사람들의 까판의 문법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학생인권조례가 마치 동네북이 된 형국이다.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팔매질과 칼질에 앞장선 사람들은 우선 국힘당 정치인들이고, 그들을 뒤에서 부추기고 몰아치는 목소리 큰 사람들은 대형교회 목사들과 신도 등 보수 기독교인들이다. 이들은 의회라는 토론의 장을 팽개치고 합리적 분석과 추론도 없이 모든 교육과 사회의 문제가 마치 학생인권조례에 발생하고 있는 것처럼 선전한다. 하나의 이슈를 사회적 문제로 터뜨리고 레거시 미디어가 받아 사실인 것처럼 보도하면 이것을 또 확대 재생산하면서 문제를 계속 키워 나간다. 전형적인 까판의 문법이다. 그럼으로써 결국 학생인권조례에 의해 교육받고 자라난 학생들이 결과적으로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고 어른과 교사들을 업신여기며 나아가 동성애를 용인하고 조장하는 싸가지 없는 어른이 되어 갈 것이라고 불안감을 조성한다.
그러면 학생인권조례는 무슨 죄를 지었는가? 무슨 죄의 항목을 포함하고 있는가? 그들이 열거하는 또는 예상하는 사회적 문제들이 모두 학생인권조례에서 기인하는가? 각 시도의 학생인권조례는 국제표준인 ‘유엔 아동권리협약’의 내용에 위배되는 것이라도 있는가? 이러한 문제들을 합리적인 준거에 의해서 토론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만들어가는 것이 의회가 아닌가? 합리적 토론과 결론 도출 과정 없이 표가 되는 사람들을 좇아가는 정치인들의 대중추수주의야말로 중우정치의 표상이 아닌가?
여기서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논쟁 전체를 리뷰하고 각 주장의 논리적 맹점을 지적하고 평가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은 교육계 내의 ‘경계의 탐구’ 시리즈의 하나로,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논란을 배경으로 교사와 학생 사이의 경계에 대한 그동안의 교육계의 암묵적 가정이 과연 교육적이고 바람직한가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 목적이다.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비판은 이 조례 때문에 학생의 영향력이 커지고 결과적으로 교사의 인권이 무너져 교육 활동이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 비판이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학생의 인권신장이 교사의 인권 하락을 가져왔다는 실증적인 결과를 제시하여야 하고, 또 이 주장에서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학생과 교사의 관계에 있어서 넘을 수 없는 경계로서 교사의 권위를 보장해 주어야 하는 것이 합당한가에 대한 검증이 있어야 한다.
학생인권조례가 교사와 학생의 경계를 완화시켜 준 것은 확실하고, 그 결과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학생인권조례가 교사와 학생의 경계를 흐릿하게 희석시킨 유일한 변수인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이미 자유주의적인 부모의 교육방법에 의해 양육된 자유로운 영혼들이 학교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사와 학생의 경계가 완화되었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인가에 대해서도 검토해 보아야 볼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분류(classification)와 구조화(framing) 체계는 점차 완화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다. 알게 모르게 세계는 여러 가지 분류체계에 의해서 구조화되고 무늬 지어진다. 국가와 국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등 신분, 남과 여 성별, 교육자와 피교육자, 직업과 직업, 일과 놀이 등등 과거에 엄격한 선(線)으로 분류되었던 경계들이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점점 무너지고 흐릿해지는 것이 이상 현상이 아니라 정상으로 인정된다. 기술과 정치의 민주화에 의해서 변화되는 이러한 자연적 현상을 지금 이 나라의 힘 있는 자들이 하는 것처럼 권력과 종교와 같은 사회적인 압력을 동원하여 복고적인 방식으로 뒤돌리려는 것이 가능한지 그리고 그게 바람직한지 따져 보아야 하는 것이다.
학생인권조례의 도입에 따른 교육계 내부의 반응 또한 마찬가지다. 학생인권이 강화되면서 추락하는 것은 교사의 인권인가, 교권이라고 말하는 교육권인가? 천부적 권리인 인권에 비교하여 교사의 교육권이라는 직권(職權)은 천부적인가? 인권과 직권의 우선순위는 무엇인가? 직권이 천부적인 권리가 아니라면 변화하고 적응해야 하는 것은 교권인가, 인권인가? 여러 가지 조건에서의 학생의 차별을 금지하라는 학생인권조례에 대항하여 어떤 차별을 인정하여 교사의 직권을 보장하라고 하는 것은 합목적적인가? 그러면 학생과 교사, 상호의 인권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학생의 학습권과 교사의 교육권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상의 논의를 중심으로 생각해 본다면 교육권이나 교사의 권위는 새로운 역할 정립을 통해서 새로운 형식과 양태로 재구성해야 하는 것이지, 법 또는 조례의 폐지 등 규범의 현상 변경에 의해서는 확보될 수는 없다. 자세히 보면 학교 안팎에서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주장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국가주의 교육문화에 익숙한 7080 세대들이다. 학교 안에서도 오히려 소위 MZ세대 교사들은 학생들과 문화적 코드가 유사한 점이 많아 그 윗세대 교사들에 비해 학생들과 잘 어울리는 것을 보면 이것을 문화지체현상의 하나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은 무너진 경계를 복구하여 담을 더 튼튼히 더 높이 쌓는 것이 아니라, 이왕 무너진, 무너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교사들이 어떻게 적응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 혁신학교 초기에 학교마다 긴 토론의 과정을 통해서 학생, 교사, 학부모가 학교에서 서로 지켜야 할 내용을 담은 학교규약을 만들었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단위학교에서 교육 주체마다 지켜야 할 학교규약을 새로 만들고 내부 협약을 만들어가는 것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동네북으로는 북을 찢는 일 말고는 새로운 해결책을 만들어 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