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럿이 국밥을 먹는데 잘 안 들어간다
특도 아니고 보통인데도 그렇다
남들은 술잔을 돌려가면서
게걸스럽게 입을 벌리고 농을 던지고
물티슈로 얼굴과 목덜미까지 닦아내는데
식어가는 국밥 앞에서
내 이마엔 식은땀만 송골송골 맺히고
개미가 등을 물어뜯는 순간처럼
온몸 여기저기가 따끔거린다
이들 중에서 내 시집을 구매한 자는
한 명도 없고, 하지만
나는 국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으며 속으로 시 한 편을 외웠다
국밥 한 그릇이 9,000원 시집 한 권이 9,000원
나는 내 길을 가고 있을 뿐인데
어째 좀 서러운 느낌이 스멀스멀 콧등으로 올라온다
그렇게 시 한 편을 외우는 동안
이들은 소주 열 병을 비우고
국밥 한 그릇을 추가했다
반절도 더 남은 국밥 속에서 창백해져 가는
내 얼굴을 그대로 묻어둔 채 밖을 보았다
창 너머 행인들이 나를 힐끔거렸다
껌을 씹는 것인지
사탕을 오물거리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입술들이 자꾸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게 누가 너더러 시 쓰래?’
‘누가 너더러 시 쓰래?
‘너더러 시 쓰래?’
‘시 쓰래?’
-시집 <가슴이 먼저 울어버릴 때>에서
시집을 보면 박노식 시인에게는 삶이 시인 것 같다. 만나는 사물마다 부딪히는 사건마다 그에게는 모두 시가 된다. 따라서 그의 시에 특별한 일도 특별한 사람도 별난 사건도 등장하지 않는다. 매 순간 매번 만나는 사람과 사물과 일상을 시화詩化하는데 골몰한다. 시집만 보면, 모르긴 몰라도 아침에 눈 뜨고 밤에 잠잘 때까지 시를 생각하고 시를 살아가는 사람일 것 같다.
시 쓰는 일은 그에게 ‘나는 내 길을 가고 있을 뿐인’ 일이다. 그것은 박노식 시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시인에게 해당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친구들이라는 사람들은 시집 한 권 사주지 않는다. 선물로 준 시집이 뜨거운 라면 냄비 받침이나 흔들리는 식탁 받침으로 쓰이는 것을 보면 복장이 터지지만, 그렇게라도 쓰이는 것이 어디냐며 자기 위로를 삼는다.
자본주의 시대에 시는, 그리고 시 쓰는 일은 분명 맞지 않는 삶의 양식이다. 시가 아니라 시인의 명성이 소비된다. 명성은 방송과 같은 매체나 유력문학지, 유명 문인과 같은 목소리 큰 스피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유포되고 소비된다. 유명한 시인들이 연예프로그램에 나와서 개그맨 못지않은 입담을 시전한다. 한 번 유명해진 시인은 국민 시인으로 영원하고, 시시프스의 노역처럼 변방에서 열심히 시를 쓰는 시인들은 어디 시 한 편 발표할 공간을 찾지 못해 끙끙거린다. 그래도 열심히 시를 쓴다. 왜? 시를 쓰는 사람에게 있어서 시는 외적인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박노식 시인의 성실한 시를 읽다가 발견한 푸념 같은 재미난 시에 나의 투덜거림 한 편 덧붙인다.
누구는 나를 시인이라고 부르고
누구는 나에게 시인이냐고 묻는다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같이
누가 읽는다고 시집을 내느냐
유명이 돈이고 방송이 유명인데
방송 한 번 안 타 본 놈이
쓰잘데없이 돈 안 되는 글이나
붙잡고 씨름하고 있느냐는
것이 시인이라 부르는 이유고
말로만 시를 쓰는 허풍쟁이 말고
이름에 안달하는 점잖은 무리 말고
사는 것이 시詩인 농부들 곁에서
몸짓과 한숨으로 시를 쓰는가
만들지 않고 지어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자연의 소리와
자연을 받드는 생명의 숨소리를
받아쓰기하며 시를 쓰고 있는가
이것이 시인이냐고 묻는
진짜 의도겠지만 두 질문 사이에서
나는 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전종호, ‘근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