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강 1
물은 흘러야 한다
낮은 곳으로 스며 가난한 땅을 축이고
굽이굽이 구석구석 반도를 적시어
바다에서 만나 한 세상을 이루어야 한다
흐르고 싶어도
여기 흐를 수 없는 강이 있다
알을 밴 연어 떼처럼 온몸으로
거슬러 올라야 사는 강물이 있다
시간의 역류逆流를 타고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사람은 만나야 하고
시간은 앞으로 나가야 하나
만날 수도 앞으로 나갈 수도 없이
분단과 경계와 금지에 맞서
홀로 물방울로 멈춘 사람들이
강가에서 살고 있다
주문呪文의 시간에서 풀려날 수 없어
세월의 허리를 붙잡고
건널 수 없는 나루터에서
하릴없이 우는 사람들이 있다
우는 사람들 곁에서
우두커니 서서 함께 우는 강물이 있다
이념을 걷어내고 거슬러 올라
모두 제 갈 길로 가야 하거늘
흐를 수도 거스를 수도 없는 강가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눈물을 따라
임진강은 오늘도 목놓아 울고 있다
강의 말씀
강마을 사람은 강물 소리를 들으며 산다. 물이 노래하는 소리와 우는 소리를 들을 줄 안다. 가뭄과 홍수에 지르는 비명을 구분할 수 있고, 평상시에는 유유자적 흐르는 물의 평안을 즐길 줄 안다. 봄의 물소리는 부드럽고 여름의 강물은 마치 코를 골며 자는 사내만큼 거칠다. 가을의 강물은 단풍 한 잎 물길에 실어 나를 만큼 운치가 있는가 하면, 겨울 강은 고요하지만 성마르며 때로는 유빙流氷으로 시절을 거스르기도 하지만, 다시 봄이 되면 겨울잠에서 깨어나기 위해서 강은 쩡 쩡 쩡 하고 우는 소리를 내며 흐른다.
나의 본류本流는 금강이다. 금강의 하류 부여의 금강은 백마강이다. 백마강은 삼천궁녀의 전설과 함께 노래를 통해서 전국적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내게는 유려한 물줄기가 흐르고, 물줄기 옆으로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백사장 한쪽 끝에 미루나무 숲이 무성한 고향이다. 우리는 틈만 나면 백마강에 가서 멱을 감고, 조개를 잡고, 백사장에서 뒹굴고 씨름하면서 유년을 보냈다. 나는 백마강을 줄인 백강초등학교를 다녔다. 당시에는 시내 가는 버스도 없어서 나룻배로 백마강을 건너서 중학교에 다녔다. 장마철에는 성난 물줄기 때문에 배가 다니지 않았다.
같은 강을 금강이라고 부르는 도시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면서 『금강』의 시인 신동엽을 배웠다. 삶이 힘들고 구차할 때는 강가에 나가 투정을 부렸다. 강은 때로는 독한 술병을 비우며 분노와 사랑을 함께 마시는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 힘으로 웬만한 고통은 버틸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숙명처럼 금강을 받들던 시인 조재훈과 비단강을 찬양하는 시인 나태주도 그 강가에서 만나서 삶과 시의 세계를 배웠다. 그들처럼 금강에서 살며 금강을 지키는 시인이 되고 싶었으나,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인생인지라 삶의 강은 이해할 수 없는 격랑을 만들어 나를 멀찍이 임진강가에 부려다 놓았다.
임진강은 북쪽 마식령에서 발원하여 북쪽 강원도를 지나 남쪽의 철원군을 거쳐 연천군에서 한탄강을 합하여 파주로 흘러들어온다. 파주와 장단을 양쪽으로 안고 흐르던 임진강은 전후 장단은 파주와 연천으로 행정구역이 재편되었으므로 지금은 파주와 연천 사이를 흐르다가 파평 쯤에서 파주시를 관통해서 흐른다. 파주는 분단으로 지금은 접경지역으로 불리나,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개성과 한양의 배후 도시로서 외교와 군사, 상업 등에서 중심부 역할을 하였고 임진강은 사람과 물류 수송의 핵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임진강은 흐르고 흘러 문산을 지나 탄현면 성동리 오두산성 앞에서 한강과 몸을 합쳐 교하交河가 된 뒤 조강을 지나 마침내 바다가 된다. 조강 수계는 남북이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국경선이다. 한강과 합친 임진강 물줄기는 조강의 김포 끝자락을 지나 강화만에서 예성강과 만난다. 예성강은 아버지의 고향을 휘돌아 나오는 물줄기이므로 여기 임진강가에 있으면 아버지의 유년과 만나는 셈이다. 아버지의 장년과 나의 유년의 금강의 물줄기는 내 마음속으로 흘러들어 와서 여기 임진강가에 나의 장년과 아버지의 유년을 합쳐 놓고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강들이 잘리고 막히며 불구의 몸이 되었으나, 다행히 임진강은 여기를 모천母川으로 삼아 회귀하는 황복을 비롯한 물고기들과 재두루미를 비롯한 새들이 있고 이 생명들과 함께 어우러져 사는 임진강의 어부와 농부와 그의 식구들과 벗들이 살고 있다. 임진강은 그들의 몸과 정신을 구성하는 질료이고 그들이 일하고 먹고 사랑하며 사는 아비투스이며 몸과 영혼의 고향이다. 강은 단순한 물줄기가 아니라, 물의 바탕으로 사는 뭇생명의 요람이며, 강가의 충적토에 땅을 이루고 그 땅에 기대어 살면서 울고 불며 사랑하고 싸워서 가꿔 온 문화와 역사가 깃든 이 곳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퇴직하고 나는 임진강가 눌노리에 아예 터를 잡고 눌러 앉았다. 임진강의 역사와 주변 풍경에 갇혀 살기로 한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는 눌노천을, 또 하루, 하루는 파평산과 감악산을 걷는다. 눌노천은 파평산 쪽에서 발원하여 식현리, 덕천리, 눌노리, 장파리, 금파리를 거쳐 두포리에서 임진강으로 합류한다. 천변에서 만나는 각종의 풀들과 온갖 새들의 자태는 늠름하다 못해 거룩하다. 파주의 파坡자는 언덕 파자인데 동네 이름도 금파리, 장파리 동파리 등 파자가 들어 있는 마을이 많다. 뒤집어 보면 언덕 밑에는 늪이나 뻘 지대가 많다는 뜻이기도 한데, 포浦자, 하河자가 들어간 마을이 많은 것도 같은 이유다. 도시화 되면서 아쉽게도 지금은 옛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옛적에는 갯가와 나루가 많았다.
그러나 뭐라 뭐라 해도 파주 하면 군대다. 옛날에는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군이 강을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쟁투한 곳이라 강을 따라 옛 성들이 많다. 현대에 와서는 한국전쟁의 주요 싸움터요, 보급기지였기 때문에 미군과 관련된 시설들과 뼈저린 역사와 아픈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다. 미군들이 새까맣게 몰려 있던 자리에는 지금 국군들이 들어와 있다. 강 건너는 물론 임진강가도 민간인 통제선이 펼쳐져 있고, 중요한 곳은 모두 군대 차지다. 높은 산에는 통신부대가 있고, 골짜기마다 산 밑마다 크고 작은 군부대들이 산재해 있다. 장파리, 눌노리, 마지리 등등, 옛날 여기서 한때 군대 생활을 한 사람들은 아직도 이쪽을 보고 오줌도 누지 않는다고 한다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임진강은 여전히 분단을 베고 바다를 향해서 흐른다. 물은 자유하고 새들은 자재하나 편견과 인습과 이념에 매여 있는 것은 오직 인간들뿐이다.
임진강 물소리를 통해서 나의 혼과 뼈와 살이 되었던 금강의 물소리를 새기고, 아버지의 유년에 배였던 예성강 물소리를 마음속에 담아 두려고 한다. 대동강, 압록강, 두만강의 장엄하고 가파른 물살을 상상하고, 북녘은 물론 유라시아로 뻗어가는 민족의 미래를 그려 보려고 한다. 시인 신동엽과 조재훈과 나태주가 금강을 찬미한 것처럼, 시인 신경림이 북한강을 시화하고 시인 김용택이 섬진강을 노래한 것처럼, 임진강 물줄기가 지나가는 마을에 누옥을 짓고 나는 임진강을 지키고 사랑하며 내 속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꺼내 임진강과 생명, 민족의 평화와 통일과 번영을 노래하며 살고자 한다.
사는 마을 이름 눌노訥老처럼 여기 임진강에서 말 없는 노인으로 눈을 감고 입을 닫고 귀를 열어 헤르만 헤세가 강물 소리에서 들었던 신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살고자 한다. 우선 임진강을 걸으며 마음 속에 모신 시 50편을 묶어 임진강가의 뭇생명들과 친구들께 바친다.
** 신작시집 임진강(중앙&미래)을 출판했습니다. 분단문학을 넘어 평화문학에 관심있는 분들의 지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