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였던 아이,
어른이 되어 깨달은 것

상처가 아니라 사랑으로 내 삶을 다시 바라보는 법

by 하늘빛


진실된 나로 다가가는 내면 여행 D+2


질문

현재의 당신을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준 힘들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있다면, 그 경험은 어떤 방식으로 당신의 삶과 성격에 영향을 미쳤나요?

초등학교 4학년, 전학 가서 가장 먼저 친해진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그 아이는 나를 왕따 시키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아이들을 표적으로 삼아 돌아가며 괴롭히는 아이였다. 그 아이의 외가가 일본에 있어서인지, 지금 생각해보면 일본의 ‘이지메(いじめ)’ 문화를 반 안으로 가져오고 퍼뜨리고 모두에게 그 규칙을 강요했던 것 같다. 한 명을 표적으로 삼고, 나머지는 살아남기 위해 그 아이를 외면해야 하는 구조. 친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친구를 버려야만 버틸 수 있는 분위기. 13명 남짓한 반에서 그 아이는 여자아이 전체를 완전히 통제. 누군가가 타깃이 되는 순간 그 교실은 세상에서 가장 좁고 가장 숨 막히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운명의 장난처럼, 나는 그녀와 6학년 졸업까지 매년 같은 반이었다.


결국 내가 그 표적이 된 어느 날. 수업을 마친 후 내 신발주머니가 사라졌다. 학교 전체를 찾아다니다가 화장실 변기 안에서 축 처박힌 신발주머니를 발견했다. 어떤 날엔 내 옷차림을 보고 놀리며 “촌년”이라는 별명을 퍼뜨려 난 촌년이 됐다. 또 다른 어떤 날엔 같은 반 친구가 기초수급자라고 나온 잡지 기사 내용을 찢어와 아이들 앞에서 조롱했다. 마치 매일 괴롭힐 새로운 소재를 연구하는 아이처럼.


그때의 나는 체육시간에도, 음악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늘 혼자였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는 순간마다 마치 발가벗겨진 채 운동장 한가운데 세워져 벌을 받는 것 같은 감정이 몰려왔다. 부끄럽고, 초라하고, 결함 있는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 그래도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더 강한 척, 더 당당한 척했지만 사실 나는 안에서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학교에 가는 것이 싫었고, 살고 싶지 않았고, 풀리지 않는 같은 질문만 끝없이 반복됐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

나는 대체 뭐가 부족했던 걸까?’


설명되지 않는 이 고통은 결국 내면으로 향했고 그때 각인된 문장은 무의식 속에서 굳어져갔다.


“나는 버려질 만한 사람이다.” “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잘못된 사람이라 그렇다.”


태어나 부모와 떨어져 지냈던 어린 시절의 기억 위에, 학교에서의 소외가 다시 겹쳐지며 그 믿음은 더 견고해졌다. 가정에서도, 첫 사회에서도… 나는 또 한 번 버려졌다고 느끼며 어린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향해 조금씩 더 깊이 다치고 있었다.


성인이 되고 시간이 꽤 지난 후, 다른 친구를 통해 그녀가 왜 나를 그렇게 괴롭혔는지에 대한 말을 듣게 됐다. “괴롭혀도 괜찮은 척하는 게 더 얄미워서 더 괴롭힌 거래.”


억장이 무너졌다. 나는 도발한 게 아니었다. 나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너무 아프고 너무 외롭지만 필사적으로 괜찮은 척, 강한 척이라는 생존 방식을 택했을 뿐이었다. 그때의 내가 떠올라 마음 깊은 곳이 저릿했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를 꺼내보기로 했다. 도망가지 않고, 그 아이의 마음을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현재 내가 겪고 있는 주된 감정과 아주 중요한 연결고리가 드러났다. 그 경험이 남긴 흔적은 아주 오랫동안 내 안에 두려움으로 조용히 숨어 있었다.


나는 최근에 혼자 있어 외로운 순간만 닥치면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갑자기 밀려왔다. 마치 “또 버려졌다”라는 감각이 온몸을 뒤덮는 것처럼. 보통 사람들은 고요함 속에서 쉼을 찾지만, 나에게 혼자 있음은 쉼이 아니라 다시 시작되는 생존 모드였다. 누구에게도 버려지지 않기 위해 애써 살아남아야 했던 그때의 감정이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외로움이 두려웠던 게 아니라, 외면당했던 어린 날의 나를 다시 느끼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었다. 두려움의 실체가 밝혀진 순간이다.


이렇게 내면 관찰 일기로 더 깊게 나와 대화 중 머릿속에 책에서 읽은 문장이 스쳐 지나갔다.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경험을 바탕을 쓴 빅터 프랭클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 나오는 구절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것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선택할 자유는 있다.


이 고통스러운 사건을, 나는 어떤 반응으로 선택하고 싶나?” 과거의 장면은 바꿀 수 없지만, 그 장면이 현재의 나에게 어떤 의미를 건네는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어둠 속에서 아주 작지만 확실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답을 지난달 읽었던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 책 덕분에 상처가 실패가 아니라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다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 책은 바로 지난 달 읽었던 로버트 슈워츠의 『웰컴 투 지구별』이었다. 이 책은 우리가 영혼으로 있을 때 태어날 환경, 부모, 관계, 심지어 인생의 고통스러운 사건까지 스스로 선택해 온다는 관점에서 최면 사례들을 보여준다. 책을 한 줄로 요약하면, 영혼은 성장과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때때로 가장 아픈 경험을 과제로 선택한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이렇게 다시 질문했다.


“만약 내 영혼이 태어나기 전 인생의 중요한 사건을 선택해 온 것이라면, 나는 왜 ‘왕따’라는 경험을 선택하고 온 걸까?” 그 질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 질문 덕분에 과거의 상처가 완전히 새로운 시선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 사건을 겪은 이유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다시 재해석하게 됐다.


• 타인의 인정 없이도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 누군가에게 선택받아야만 존재할 수 있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 다른 사람의 고통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감응과 공감의 능력을 갖추기 위해

•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진짜 나로 살아남기 위해


상처를 미화하려는 시도는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바라보는 순간 그때의 나는 무너지기만 한 아이가 아니라 성장하고 있던 존재였다는 느낌이 선명해졌다. 상처는 벌이 아니라 약속이었다. 영혼이 더 큰 사랑과 빛을 깨우기 위해 스스로 선택해 온 경험이었다. 돌아보면, 그 모든 시간 속의 나는 정말 용감했다. 그렇게 외로운 전쟁 속에서도 단 한 번도 삶을 놓지 않고 사랑이 없었던 공간을 온몸으로 통과한 어린시절의 나. 지금 나는 그 아이가 너무 자랑스럽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네가 당한 상황이 잘못된 거지, 네가 잘못된 게 아니야.

사랑받지 못한 게 아니라 사랑을 배우기 위해 사랑이 없음을 먼저 경험했을 뿐이야.

버려진 것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도 스스로를 버리지 않는 존재가 되기 위해 버틴 거야.

그토록 아팠던 건 네가 누구보다 진심으로 연결되기를 갈망했고

누구보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려는 존재였기 때문이야.

무엇보다 네가 그토록 강했기에 지금의 단단하고 빛나는 너로 성장한 거야.”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가 지금 과거의 나처럼 같은 일로 아프고 외롭다면 조심스레 전하고 싶은 말,

즉 내가 그 당시 듣고 싶었던 말이 있다.


지금 겪는 이 시간이 끝이 아니라, 당신이 더 깊어지고 있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당신이 지금도 견디고 있다는 사실.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이미 사랑입니다.

그 이유는 당신을 흔드려는 외부의 사람들이 그 누구든 당신 안에 있는 빛나는 마음을 가져가지 못할 때,

그 순간, 당신이 이미 이기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존재 자체로 이미 사랑입니다.

그 어떤 경험이라할지라도, 당신 안의 빛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작가의 이전글어린 시절 기억 속 사랑의 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