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질 수밖에 없던 자리에서, 나를 믿는 쪽으로
진실된 나로 다가가는 내면 여행 D+30
질문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간을 통과할 때, 나를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준 말, 책, 영상, 혹은 장면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고, 왜 그것이 나에게 힘이 되었을까?
⸻
내 인생에는 몇 번의 깊은 어둠이 있었다. 어릴 때 조부모님의 손에서 자라며 겪었던 핍박의 시간, 뉴욕에 처음 이민 와 코로나 속에서 인간관계가 무너졌던 순간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던 시기는 대학병원 암병동에서 신규 간호사로 일하던 시절이었다.
초짜 간호사로 중증도가 가장 높은 암병동에 배치되었고, 매일 출근 전마다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혹시 내가 환자를 죽이면 어쩌지.
제발 욕 안 먹고, 안 혼나고, 잘 지나가기를
오늘은 또 어떻게 버티지…
병동에는 태움이라 불리는 집단적 괴롭힘이 만연했다. 선배들의 고함, 공개적인 비난, 끝없는 비교.
어느 날은 등짝에 손이 날아오기도 했다.
처음에는 분명했다.
그들이 나를 괴롭혀서 괴로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문제는 달라졌다.
그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내 안에 들여와
내가 나 자신을 더 잔인하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나는 그들보다 더 가혹하게 나를 다루고 있었다.
아무리 애써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매번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초반부터 이유도 모른 채 시작부터 찍힌 사람이 되었는데, 퇴사 후에야 들은 이유는 황당했다.
누군가 내 뒤를 봐주는 낙하산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혀 사실이 아니었고,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온갖 가십이 난무하는 병원에서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밝게 버티려 애썼다.
그러나 괴롭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풀이 죽어야 만족스러운데
내가 쉽게 꺾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자
건방지다는 말이 돌아왔다.
이래도 욕먹고, 저래도 욕먹는 상황.
그 시절의 나는 결국 이렇게 결론 내렸다.
그냥 내 존재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 거구나.
무너지지 않기 위해 나는 그저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선택한 대처 방식은 전혀 건강하지 않았다. 근무가 끝나면 술로 마음을 눌렀고,
어느 날은 심하게 취한 채 계단에서 굴러
왼쪽 발목을 크게 다쳤다.
다친 몸보다 먼저 돌아온 것은 비난이었다.
병가로 인한 업무 부담,
쓸데없는 소문,
다친 이유까지 문제 삼는 시선들.
심리적 압박은 결국 몸으로 터져 나왔다. 전신 알레르기 반응으로 피부가 붉게 부어오르고 가려웠지만 동료가 놔준 주사 한 대를 맞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일을 해야 했다.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상태로 계속 버티다가는
내가 정말 사라질 수도 있겠구나.
자살하는 간호사들의 심정이
처음으로 진심으로 이해되던 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도망이 아니라, 나 자신을 되찾기 위한 선택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아팠던 건
힘듦에 치여 내 꿈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2년 9개월의 경험이면 뉴욕으로 가기에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간호학과에 입학할 때부터 품어왔던
미국 간호사라는 목표를 위해
마침내 용기를 냈다.
하지만 돌아온 말들은 응원보다 조롱에 가까웠다.
뉴욕 살기 쉽지 않아.
여기서보다 더 못 벌어.
베네핏 좋은 병원 두고 왜 나가.
마치 병원을 그만두는 것이
전투에서 패배한 루저가 되는 일처럼 취급받았다.
그럼에도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선배들의 모습 속에서
내 미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의 삶이 괴로워
타인의 가능성까지 끌어내리는 세계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도전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한 말은 힘이 없다.
무엇보다 태움 문화를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시절 나를 붙잡아준 것은
미국 의학 드라마들이었다.
Grey’s Anatomy, ER, Dr. House.
영어 공부를 위해 보기 시작했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고통과 선택, 회복의 서사가 담겨 있었다. 드라마라 현실과는 다른 점도 있지만 병원을 배경으로 그려지는 이야기들을 통해 미국의 문화를 간접 적으로 접하며 꿈을 키우기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중에서도 Grey’s Anatomy 속 한 장면은
지금도 내 안에 깊이 남아 있다.
So, do it. Decide.
Is this the life you want to live?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결국 선택해야 한다는 이 문장은
내가 나 자신을 믿고 행동을 선택하게 만드는 힘이 되었다.
Change. We don’t like it…
But sometimes, change is everything.
두려움 앞에서도 변화가 삶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그 장면을 통해 배웠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내 마음에 남아 있는 문장.
Bad things happen,
but you have to move past it.
Leave it behind.
이 문장은 나를 피해자로 두지 않았다.
무너지라고도, 강해지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나아갈 선택권이
여전히 나에게 있음을 조용히 상기시켜 주었다.
그래서 나는 뉴욕으로 갔다.
그 선택은 도망이 아니라
나 자신을 믿는 쪽으로의 이동이었다.
돌이켜보면 뉴욕에서 꿈을 이루었고,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숱한 도전의 연속을 지나왔다.
그 시간들은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고
나 스스로를 신뢰하는 감각을 되찾게 해 주었다.
사람을 무너지게 하는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고통 앞에서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다.
그리고 때로는
한 문장, 한 장면, 한 질문이
가장 어두운 순간에 찾아와
사람을 다시 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