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게 느끼는 짜증은 내게 어떤 가르침을 주는가?
질문
다른 사람의 어떤 특성이 당신을 가장 짜증 나게 하거나 속상하게 하나요? 그 특성들이 혹시
당신 자신에게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어떤 부분을 비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는 가끔, 정말 사소한 장면에서 유독 날카로워진다.
누군가의 말투 하나, 계산적인 행동 하나에
마음이 순식간에 굳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럴 때면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왜 하필 이 장면에서 나는 왜 이렇게 예민해지는 걸까?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칼 융(Carl Jung)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가 타인에게서 느끼는 모든 짜증은 결국 나 자신을 이해하는 길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융은 타인을 통해 느끼는 불편함을 우연으로 보지 않았다.
외부의 자극은 내면의 거울이 될 수 있고,
타인에게서 나를 괴롭히는 지점은
내 안에 아직 의식화되지 않은 부분,
즉 그림자가 반응하는 순간이라고 보았다.
이 관점을 떠올리다 보니 뉴욕 실용철학 수업에서 배웠던
불편한 상황이나 감정을 다루는 도구가 생각났다.
일상에서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거의 모든 순간에 적용할 수 있는 질문.
그리고 놀랍게도, 이 질문은 내 안에 있는 지혜를
조용히 길어 올리는 도구가 되어주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 이 상황, 이 경험이 만약 나의 스승이라면,
나는 이것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이 질문은 관계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 놓는다.
상황이나 상대를 평가하고 판단하던 자리에서
나 자신을 관찰하는 자리로 시선을 되돌려 놓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짜증이 올라오는 순간들을
하나씩 적어보기로 했다.
이 감정이 정말 상대의 문제인지,
아니면 내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내 안의 어떤 부분을 건드린 것인지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돈을 지나치게 아끼는 모습을 볼 때다.
몇 푼을 아끼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시간의 흐름이나 가치에는 무감각해 보일 때
나는 유독 더 예민해진다.
또한 베풀 줄 모르고 모든 것을 계산적으로 대하는 태도 앞에서
강한 거부감이 올라온다.
그 지점을 가만히 바라보며
나는 나에게 이렇게 묻게 된다.
혹시 내 안에도 여전히 돈에 대한 결핍의 두려움이 남아 있기에,
나는 일부러 흐르게 하는 방식을 선택하면서도
그 반대의 모습을 더 날카롭게 밀어내고 있는 건 아닐까.
두 번째는
감정을 말투에 실어 툭툭 던지는 사람이다.
말의 내용은 물론 어투에서 공격을 느끼는 순간,
나는 거의 즉각적으로 내 말투와 에너지가 바뀌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순간의 나는
상대와 아주 비슷한 공격적인 톤을 띠고 있다.
여기서 나는 분명히 나의 그림자를 본다.
나는 감정을 오래 관찰해 왔고,
스스로 감정을 잘 다룬다고 믿고 싶어 하지만,
여전히 표현되지 못한 욱하는 분노의 감정이
말투를 타고 튀어나오는 순간들이 있다는 사실을.
세 번째는
말은 하지만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모습이다.
약속을 가볍게 여기거나 계획을 말로만 남겨두는 태도를 볼 때
나는 실망을 넘어 짜증을 느낀다.
이 감정을 따라가다 보니
그 밑바탕에는 언제나 기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가 무너질 때 생기는
조용한 좌절감이 그 자리에 있었다.
어릴 적, 기대에 부풀어 들었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나는 크게 항의하지 못한 채
(불평하면 사랑받지 못할까 봐)
조용히 실망을 삼켰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래서 오랫동안 나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여 왔고, 그 기준이 흔들리는 장면에
유독 크게 반응했던 것 같다.
이렇게 적어보니 분명해진다.
내가 타인에게 느끼는 짜증은 그 사람을 판단하기 위한 잣대가 아니라,
내 안에서 아직 화해되지 않았거나 통합되지 않은 부분을 알려주는 하나의 신호에 가깝다는 것을.
하지만,
여전히 짜증 난다.
여전히 예민하다.
여전히 완벽하고 싶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이 불편함을 없애려고 애쓰기보다
그 앞에 잠시 서보려고 한다.
내가 원하는 길을
스스로 내고 싶어서.
그래서 다시 나에게 묻는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만약 나의 스승이라면,
이 관계는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걸까.
융의 말처럼,
그리고 이 질문처럼,
타인을 통해 드러나는 불편함은
결국 나 자신을 더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기회이자 초대다.
그래서 크게 불편할수록
그만큼 큰 스승이 내 앞에 온 셈이고,
그 점에서 이 만남은 불행이 아니라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지점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불리한 진실 앞에서
합리화하는 데 매우 능숙하기에,
이런 관계와 상황이 아니고서는
결코 스스로 볼 수 없는
맹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맹점을 건드려준 계기에 대해
이 불편함을 느낀 지점에서,
나는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내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