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안전한 사람들
나는 누구 앞에서 가장 편안했고,
그 사람이 만들어 준 안전감은 내 안의 어떤 욕구를 채워주었나요?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잠시 멈췄다.
사소한 부탁을 가장 편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족이 떠오르지만.
이 질문에 가족이라는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묻기 전에,
나는 편안하다는 말의 뜻을 다시 찾아보았다.
몸과 마음이 걱정이나 괴로움 없이 좋은 상태
그 정의를 읽는 순간,
왜 가족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바로 알게 되었다.
가족 앞에서의 나는
걱정과 괴로움이 사라지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더 조심스러워지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힘들다고 말할 수 없는 관계가 가족이었다.
각자 지고 있는 삶의 무게가 상당해서
세계 여행을 하며 돌아다니는 나까지
그 무게를 더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흔들리면
그들의 삶까지 함께 흔들릴 것 같았고,
감정적으로 짐이 되는 것이 싫어서
나는 내 힘듦을 가족에게는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이 질문에 떠오른 사람들은
가족이 아니라 몇 명의 친구들이었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
그들 앞에서의 나는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 애쓰지 않는다.
잘난 척도, 정리된 이야기만 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 정말 G랄 같은 내 모습도 그들 앞에서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모습을 허용해 주는 사람,
어떤 것도 괜찮다고 하는 사람들이 내게 있다.
나의 단점도,
취약함도,
허물도,
그들 앞에서는 숨기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과의 대화에는
주제의 경계가 없다.
대화가 맛있다.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함께 있어도 좋다.
존재 자체가 편안하다.
지금 이 글을
2025년의 마지막 날에 쓰고 있는데,
내 인생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감사하고,
정확히 축복처럼 느껴진다.
나는 원래 연결되고 싶은 욕구가 강한 사람이고,
그 욕구는 그들을 자주 보지 않고 그 존재만으로도
충족이 된다.
나는 지금 누군가와 통하고 있구나.
내가 세계를 떠돌아다니고,
각자 다른 나라에 흩어져 살아도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우리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 좋다.
내가 진짜로 원했던 관계는
곁에 있는 관계만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가
있는 그대로 허용되는 관계였다.
그리고 나에게 관계에서 편안함이란
나 자신으로 있어도 되는 감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