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일기를 쓰기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면 왠지 재미없는 풍경이 나를 맞이한다.
처음 집을 구할 때에는 몰딩 색도 하얀 거였으면 좋겠고, 벽지도 좀 더 깨끗한 - 찢어지지 않은 벽지였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실 이 공간이 나에게 주어진 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이는 이 풍경은 재미없지만, 그래서 다행이다.
내가 하루를 재미있게 채워 나가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이 공간에 들어오고 난 뒤 곧바로 시작된 '기억의 후폭풍'이라는 건 나를 힘들게 한다.
재미있는 하루라는 건 아주 살짝 불가능한 일이다.
나의 기억을 정리하고 싶은 충동에 호기롭게 만들어 둔 매거진 하나는, 프롤로그 하나만 써둔 채 계속 빈 공간이다.
생각의 정리 후 기억을 여며내어 러그를 만들려 했다. 문제는 그 과정이 참 어렵다는 것이다.
내가 무두질, 바느질에 이렇게까지 서툰 인간일지 몰랐다.
뜨거운 날이지만, 왠지 카페에 가고 싶었다.
더운 바람이 나오는 선풍기를 목 아래에 댄 채로 카페에 갔다.
도보 30분 거리.
즉, 왕복 1시간.
집 앞에 카페가 없는 것도 아닌데 낮기온 34도에 한참 걸어서 카페라니.
하지만 오늘은 왠지 맛있는 커피가 간절했고, 기분 전환 나들이가 절실히 필요했다.
뜨거운 날씨에 대한 보상을 차가운 커피로 받아냈다!
크.
시원했다.
3년 일기장으로 호기롭게 시작한 이 녀석.
자그마치 한 달 분이 밀려 버렸다.
하루 일과를 기록하는 또 다른 곳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병원을 왔다 갔다 하느라 체력이 남은 게 없어서인지.
도저히 기력이 딸려 일기를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일기는 밀리면 좋지 않다.
기억의 유통기한은 남들보다 긴 편이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기억을 끌어내다 보면 그 순간의 감정이 다시 올라 오기 때문에 마음이 격해지기 때문에 위험하다.
결국 보름 분의 일기를 꾸역꾸역 쓴 다음 덮어 버렸다.
나머지 분량은 미래의 내가 다시 써 주겠지.
믿는다, 나 녀석.
어렸을 때 도서관에서 재미있게 읽었던 꼬마 흡혈귀 시리즈.
20권까지 몽땅 샀다 - 이것이 어른의 플렉스.
다만 완결은 21권이더라. 그리고 한국에는 안 나왔더라.
어쩐지, 꼬마 흡혈귀가 대체 어떻게 끝났는지 도저히 기억이 안 나더라 싶었다.
20권까지 읽고 난 뒤 완결이 나지 않아 찝찝한 마음에 마지막 권이 뭔지 검색해 보다가, 나무위키에서 결말을 알아 버렸다.
기분이 상당히 쭈글쭈글해졌다.
전혀 예상 못 했던 결말이기에.
나는 어렸을 적에는 안톤이 참 부러웠더랬다.
답답한 부모님의 품에서 잠시나마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엉뚱한 흡혈귀 친구 뤼디거가 갖고 싶었었다.
지금 어른이 된 눈으로 바라보는 안톤은... 등짝을 수십 번 때려 주고 싶다.
정말이지, 미워도 너무 밉다.
안톤의 부모님 흰머리가 늘어가는 소리가 한국까지 들린다.
부모님은 할 만큼 했다, 애 심리 상담까지 보내고 뤼디거 안나를 이해하려고 별 노력을 다 하셨다.
안톤 너는 나중에 커서라도 부모님께 잘해라 진짜로.
고기만 먹으면 질려 버리니까 냉면도 같이 먹은 저녁 식사.
확실히 단백질을 먹고 나면 배가 든든하다.
물론 저 양을 보면, 배가 허하면 안 되는 양이긴 하다.
나도 양심이 있기에, 남기긴 했다.
상담을 다녀오면 보통 다음날, 혹은 그다음 날까지 진한 여운이 남아 있어 마음이 힘들다.
아마 오늘은 일기 때문에 더 그렇지 않았을까.
내일은 뭘 하면 좋을까... 골똘히 생각해 본다.
주말이면 늘 나가고 싶어 져서 문제다.
잘 고민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