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좀 실패
경춘선 타기
10월 말.
경춘선이 시작되는 지점인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2011년, 나는 경춘선을 탄 적이 있다.
그때의 출발지는 상봉역.
묘하게 도떼기 시장 느낌을 풍겼던 경춘선은 배차 간격이 길었고, 어마어마한 인파 덕에 종점인 춘천까지 서서 갔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의 나는 항암 중인 까까머리였고, 바닥난 체력에 지친 다리를 통통 두들기며 매콤한 닭갈비를 맛도 모르며 먹었더랬다.
지하철 노선도를 펼쳐 보니 경춘선의 시작점은 상봉역이 아닌, 청량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뚜벅이에게 정말 고맙게도 서울의 지하철 노선은 잉크처럼 스멀스멀 번져 간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이 마치 지하철의 다크서클 같아 애잔함을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이번 청량리 경춘선은, 내심 고맙고 기뻤다.
어쩌면 상봉역까지 서서 가기엔 내 체력이 많이 후달렸기에 - 그래서가 아니었을까.
사실 이 날 컨디션이 좋진 않았다, 아니 최악에 가까웠다.
여하튼 청량리역에서 화장실을 한 번 들렀다 가면 딱 좋겠는데, 도저히 화장실이 어딨는가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가평에서 볼일을 해결할 각오로 경춘선에 올라탔다.
날이 쌀쌀해져서인가 시트가 매우 따뜻했고, 일순간 긴장되었던 몸이 풀어지며 노곤해짐을 느꼈다.
즉시 머릿속에 빨간 불이 켜졌다.
'위험하다.'
지금 잠이 들어 버리면, 엉덩이의 따끈함이 단순히 시트 때문만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
그것은 막아야만 한다.
한 시간 동안 감겨오는 눈을 수리부엉이처럼 부릅뜬 채 가평으로 향했다.
눈이 건조해지는 것이 느껴지며, 나중에는 내가 어딜 노려보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가평이다아아
"이번 역은 가평, 가평입니다."
감사합니다.
산뜻한 마음을 지닌 채 가평역 바깥으로 나왔다.
내 인생에서 개나리색이 이렇게까지 아름다운 적이 있었던가.
나의 눈이 색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네이버 지도를 켜서 남이섬까지 가는 길을 다시 한번 체크했다.
가평역에서 남이섬 선착장까지 걸어갈 수는 있으나 도보 33분.
일단 지금은 체력을 비축하자.
남이섬 근처까지 가는 10-4번 버스를 타고 가면 10분 만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런데 배차 간격이 30분이다.
그리고 얄궂게도 횡단보도 녹색불을 기다리며 지나쳐 가는 10-4번 버스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떠나가는 연인을 보는 심정으로 입술을 살짝 벌린 채, 한 손에는 네이버 지도가 켜진 핸드폰을 들고.
오 마이 갓.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시작된, 세상 재미없는 선착장까지 걷기가 시작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추위에 약한 나의 갤럭시 플립 5가 힘들다고 꺼져 버렸다.
야, 너 방금 34 퍼라며.
늘상 들고 다니는 보조배터리로 긴급 수혈을 한 뒤, 비실비실 정신 차리는 핸드폰을 깨워 남이섬까지 걸어가는 풍경을 강제로 몇 장 담아 보았다.
약간의 tmi를 풀자면, 나에게 핸드폰이 꺼지는 순간은 터널 한가운데서 시동이 꺼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다급함일 것이다.
이 녀석의 약정이 끝나는 대로 보내 주어야만 하는 것인지, 안타까움이 몰려왔다.
아니 솔직히 안타까움 30%, 갤럭시 울트라에 대한 기대 70%였다.
... 미안해 플립, 날 욕해도 좋아.
남이섬 입성
미리 트립닷컴에서 결제해 간 남이섬 입장권을 이용하여, 줄 설 필요 없이 선착장 앞까지 프리패스로 갈 수 있었다.
오랜만이야 선착장.
QR 시스템은 참 편리하지만, 실물 티켓을 받을 수 없어 아쉽기도 하다.
나 같은 기록쟁이에게는 더욱더.
잠깐 멍 때리다 보면 배는 금방 도착한다.
'예전에 계단 위에 올라가서 풍경을 본 기억이 나는데?'
배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 보니 역시나 동글뱅이 계단이 있었다.
탁 트여서 무섭다.
그리고 탁 트여서 빠질 것 같다.
나는 아마 배를 타면 타이타닉 포즈는 절대 못할 것이다.
산 정상에서 양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야호'도 절대 못할 것이다.
남이섬으로 가는 길에는 갈매기가 없다.
나의 시선을 빼앗아 갈 생명체가 없으니 무서움과 혼자 싸워야 한다.
... 꼴랑 짧은 시간 배 타면서 걱정은 다 하고 앉았다.
남이섬에 도착 - 땅이다.
감사합니다.
한국 관광 100선 스탬프 여권을 꺼내 남이섬 관광 안내소에서 도장을 찍었다.
이로서 강원권에 도장이 하나 추가되었다!
따사로운 날씨, 파릇한 남이섬.
분명 날짜 상으로는 가을이었지만, 이렇게 관광객이 많은데도 남이섬은 아직 여름에 걸쳐 있었다.
이 상황이 마치 시소 같다고 느꼈다.
관광객 무게를 다 합쳐도 남이섬의 엉덩이가 조금 더 무거운 모양이었다.
남이섬을 뚜벅뚜벅
열차가 지나다니는 작은 기찻길에서, 남이섬의 가을을 느꼈다.
집에서 내려온 따뜻한 드립커피.
살짝 미지근해졌지만, 마시기 편해져서 좋았다.
사진 상으로는 한적해 보이지만, 사진에 사람이 많이 안 걸려 있는 것을 고르고 골라낸 것이다.
실제로는 어딜 가든 사람 천지인 남이섬.
내가 정말 걷고 싶었던 메타숲도, 아직은 가을 한 스푼을 살짝 얹었을 뿐인 늦여름이었다.
소원탑.
우리나라 사람들은 소원 비는 것을 참 좋아해.
- 물론 거기엔 나 포함이다.
아기자기한 돌탑은 참 사랑스럽다.
누가 깔아 뒀을지 모르는 소원 위에, 나 자신의 소원을 한알 얹는다.
그리고 내 위에 또 다른 사람의 소원이 살포시 올라탄다.
그래서 탑을 쌓을 때 숨을 죽이는가 보다.
내가 잘못하면, 다른 사람 소원도 무너질까 봐.
그리고 다른 사람의 소원이 날아갈까 봐 내 소원으로 살포시 누르는가 보다.
'당신의 소원이 날아가지 않게 내가 도울게요, 이루어지길 바래요.'
대신 아래에 위치한 소원은 내 소원이 올라탈 수 있게 등을 내어 준다.
웃으며 조심히 탑을 쌓는 사람들이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참 소중했다.
나는 돌을 쌓는 대신 종을 울려 보았다.
'건강하게 해 주세요.'
애초에 나는 쌓아둬서 병이 나는 사람이니까, 분출이 좀 필요하지 않을까?
그냥 내 생각이 그랬다, 의학적 효과는 모르겠고.
손에 느껴지는 묵직한 진동에 비해 부드러운 음색의 종소리가, 마치 고소하고 진한 크림라떼 같았다.
송파 은행나무길.
남이섬에서 가장 가을스러운 곳.
그래서 가장 사람이 많기도 한 곳.
칙촉
기념품샵에 들어갔다가, 당의 유혹을 못 이기고 결국 먹거리를 구입했다.
애초에 뭘 사 먹을 생각을 안 했는데, 돈을 썼다.
사람들 사이에 극명하게 갈리는 취향이 몇 개 있더라 : 예를 들면
짜장면 vs 짬뽕
부먹 vs 찍먹
칙촉 vs 촉촉한 초코칩
나는 본래 뼛속까지 촉촉한 초코칩 파였다.
아주 오랜만에 먹은 칙촉은 생각보다 푸석하지 않고 단단했고, 정직하게 달아서 맛있었다.
'왜 칙촉을 싫어했더라?'
한참 후에야 이유를 찾았다.
칙촉은 우리 가족이 좋아했던 과자, 그래서 내 손에 쥐어질 일이 없었다. 칙촉은 질투의 과자다.
그리고 촉촉한 초코칩은 당시 내가 친해지고 싶었던 애가 즐겨 먹었던, 동경의 과자다.
'칙촉, 얘 맛있는 애였네?'
어느새 쌀쌀해진 바람을 맞으며 오독오독 칙촉 3 봉지를 까먹고, 싸늘해진 텀블러 속 커피를 호록 마셨다.
배를 타고 남이섬에서 나왔는데, 직전에 버스가 떠난 모양인지 30분 후에 도착한단다.
그래서 다시 가평역까지 다시 걷게 되었다.
노란 꽃에 기분이 좋았다.
걷길 잘했다고 중얼거리며, 개나리색의 가평역으로 향했다.
이날 밤 나의 냉장고에는 노란색 목도리를 두른 눈사람 마그넷이 추가되었고, 쿠팡으로 주문한 칙촉 2박스는 이른 새벽에 나의 집 문 앞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가을은 생각의 계절
알록달록한 낙엽은, 나무가 해온 생각의 결과물 같다.
즉, 낙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은 나무의 일기장을 읽는 것.
봄에는 다 같은 이파리 같아 보이지만 가을이 되면 묘하게 각자 다른 색상을 지닌다.
그리고 미련 없이 떨군다, 생각을.
마치 사람처럼.
그래서 가을은 묘하게 쓸쓸하다.
나랑 같은 마음일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그 사람들은 나와 달랐다.
그것을 깨달은 뒤 두려웠고, 홀로 남겨진 듯하여 고독했다.
나는 현재 경주로 가는 ktx 안에 앉아 있다.
그곳에서 가을을 만끽하리라.
아니 그런데 사실 느낄 여유가 있는가 모르겠다 - 나는 본래 수학여행 수준으로 계획을 짜는 스타일이라.
지칠 때까지 걸을 것만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