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다그치지 말자 나 자신을
이사 올 집을 정하고 한참 가구 배치를 고민할 때였다.
왠지 ㄴ자 주방을 만들고 싶었다.
최대한 머리를 굴린 끝에, 싱크대 끝단에 맞추어
밥솥과 전자레인지, 쌀통을 보관할 보조 조리대를 하나 놓았었다 - 길이 110cm 정도.
그러다 보니 구석에 정말 애매하게 45센티 정도 폭의 공간이 남게 되었는데 이 공간이 참 싫었었다.
보조장을 하나 더 놓아야겠다 - 이 참에 고민을 하던 에어프라이어도 하나 사자.
그러다 보니 그 위쪽으로는 커피포트와 브리타 정수기를 하나 놓고.
점점 커피도 갖다 놓고 차도 갖다 놓고...
그래서 탄생한 이곳.
단차가 2센티 정도 나서 사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대충 보면 그럭저럭 또 신경 안 쓰고 살게 되는 공간.
스위스미스에 미떼가 꽂혀 있는 언밸런스함도 그냥 뭐.
재작년 겨울에 홈플러스에 갔다가, 저 틴케이스 때문에 다소 충동적으로 핫초코를 샀더랬다.
딱 하나 남아 있던 스위스미스 핫초코를 어제 다 마시고 - 미떼를 새로 사서 채워 넣었다.
그 옆으로는 커피 원두.
나중에 커피 연재 때 올릴지 모르겠지만 - 원두를 직접 갈아먹어 보고 싶어 얼마 전 그라인더를 하나 샀다.
그러니까 그게 벌써... 대략 이십 년 전.
종로의 어느 카페에 갔다가 저렇게 생긴 그라인더를 보고 한눈에 반했었다.
카페 사장님은 '은근히 관리하기 불편해요.'라고 하셨지만,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왠지 나를 돌보는 느낌 같았달까 - 조용히 보글보글 끓는 물, 그 옆에서 원두를 돌돌돌 갈아낼 때 향긋하게 풍기는 진한 커피의 향.
굉장히 여유 있는 삶의 모습처럼 느껴졌었다, 아마 로망이 된 것 같았다.
정작 그라인더를 구매하게 된 계기는 바로 게임이었는데.
동물의 숲을 작년... 여름까지 하다가 딱 접었던 것 같다.
모두 나를 반겨 주는 환상의 세계 동물의 숲.
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DIY에 열중하고 컬렉션을 완성하려, 무언가를 성취하려 노력하고 있더라.
주민들은 내가 꾸며 놓은 벤치에 앉아 차도 마시고 수다도 떨고 운동도 하는데
나 혼자서만 치열한, 마치 현실의 내 모습 같았다.
아마 온라인으로 같이 즐길 이가 없어서 더 그랬던 걸까.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주민들에게 인사도 하고 선물도 건네었었다.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마스터'에게 가서 매일 뜨거운 커피를 두 잔씩 마셨다.
하지만 그래봤자 현실과 다를 바 없는 게임 상의 모습에 현타가 왔었던 것 같다.
얼마 전 동물의 숲이 업데이트되었다 해서 다시 플레이를 해 보았는데, 호텔이 하나 생겼더라.
DIY로 만든 것을 납품하는 그 시스템이 마치 게임 '헤이데이' 같았달까 - 그런데 역시 소통 없이 나 혼자서만 즐기는.
'역시나 DIY인가.'
여하튼 오랜만에 다시 박물관 2층 마스터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던 중에, 여유 있게 커피를 내려 주는 마스터의 모습에 다시 반했다.
나도 커피를 직접 내려서 마시고 싶었다.
- 그래서 장바구니에만 넣어 두었던 그라인더 구매까지 가게 되었다는 뭐 그런 이야기.
나에게 있어 커피 그라인더는 일종의 보상 아이템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거창한 업적을 이룬 후에야 선사할 수 있는 퀘스트 클리어 아이템.
그러다가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그때가 대체 언제인 걸까?
나의 삶을 보상하는 게 지금이면 안 되는 걸까?
요즘 커피를 내려 마시는 짧은 시간이 꽤나 행복하다.
그리고 그거면 된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집에서 버섯을 키워 보았었다.
정말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버섯이 무서울 정도였다.
나의 느타리를 수확하여, 콩나물을 넣고 잡채를 한가득 만들었었다.
딱 요 사진을 찍고 잡채를 먹던 중 갑자기 호흡곤란이 와서 약국에 전화를 걸었고,
아무래도 버섯 알레르기인 것 같다는 진단과 함께 알레르기약을 사서 먹었다.
이틀간 비실비실 살았다.
당분간 나의 밥상에 버섯은 없을 것이다.
이로서 합법적으로(?) 못 먹는다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음식이 하나 더 생겼다.
단지, 그게 좋아하는 거여서 조금 서글프기는 하다.
사실 지금 무슨 마음으로 대낮에 일기를 쓰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요즘 글이 써지지 않는, 생각조차 멈춘 듯한 초조함에 뭐라도 써 보는 것 같다.
역시 나는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사람인 지라
한파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나의 머릿속도 휑하고 추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기를.
마음이 포근포근해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