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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May 12. 2023

남편은 탈모인

탈모인 배우자를 끝까지 사랑하기로 했으니까


결혼이란 걸 하니, 남편이 오래된 친구 같다. 같이 나이가 드니 그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내 기억 속에 포개진다. 마치 그의 앞에 여러 개의 거울을 놓고 비쳐보는 것과 비슷하다. 그 거울에는 젊고 아름다운 옆모습이 있다. 흐트러짐 없이 곧게 뻗은 코에 날렵한 턱선, 가까이서 보면 내가 좋아하는 쌍꺼풀 없는 눈에 걸친 안경에 예민하고 지적인 성정이 여실히 드러난다. 다음 거울엔 마흔이 넘은 남자가 있다. 성장판이 막혀 키는 안 커도 하관 턱뼈가 네모나게 성장할 수 있다는 인체의 신비를 알려준 아저씨. 라식을 하고 안경을 벗더니 점점 느끼하게 쌍꺼풀 자리가 생기고 있는 위태로운 남자. 변한 외모가 조금 속상하지만 실망은 금물. 다시 포개지는 거울엔 언어의 연금술사가 맞이해준다. 내가 정신없이 떠드는 말을 이리저리 만져서 내 언어를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으로 만들어 주는 대화의 마법사. 내 불완전한 언어는 그의 내면에 담가졌다 나오면 깨끗하게 다린 하얀 이불보처럼 낯설고 아름다워진다. 그래서 그가 만든 풍경은 따사로운 석양빛이 부서지는 공기 속에 설탕을 뿌려 놓은 듯 달콤하게 빛난다. 그리고 다음 거울엔 그의 얼굴이 빛난다. 머리숱이 얇아지고 앞이마가 점점 점점점 점점점점 빛나고 있다. 아, 내 남편은 빛나는 앞이마를 가진 현재진행형 탈모인이다.



대머리가 돼도 사랑해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나는 물러설 곳이 없다. 남편이 대머리가 될 거라는 상상을 성실하게 적금 붓듯 쌓아놓고 언젠가 올 만기 해약을 기다리고 있다. 아직 머리카락이 잘 버티고 있어서 탈모가 서서히 진행되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남편은 한때 먹었던 탈모예방약을 끊었다. 현상유지를 해준다고 믿었는데 그 약을 끊고도 몇 년동안 현상유지 속도가 같자 이게 뭐하는 짓인가라는 현타가 왔다고. 그는 탈모샴푸를 신중하게 고르고 여러 미용실을 옮겨 다녔다. 하지만 새로운 모발이 비슷한 양으로 나지 않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리라. 그리고 며칠 전 나는 남편으로부터 회한 어린 고백을 받는다. 뒤에 머리를 앞으로 심는 시술을 받고 싶다고. 그 고백이 시린 강풍이 되어 낭떠러지에 서 있는 내 심장을 때린다. 그를 꼭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머리 심을 때 많이 아플 텐데, 괜찮겠어? 남편은 순간 서러워졌나 보다. 마취제 바르고 해도 아프긴 하대. 그렇구나. 한 번 더 토닥거린다. 남편은 또 울컥한가 보다. 이건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인가 봐. 일론 머스크도 결국 모발 이식했잖아.



탈모는 어쩌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에 투쟁하는 인간의 굴레를 가장 현대적으로 보여주는 메타포가 아닐까.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은 신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결국 삶은 신의 말씀을 넘어서질 못했다. 현대사회의 운명은 유전자로 치환된다. 내 몸안에서 언제 힘을 발휘할지 모르는 강력한 우성의 힘. 암도 유전이고, 비만도 유전이고 탈모도 초강력 유전이다.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며 레슬링을 즐겼을 그리스 미소년들도 어쩌면 탈모로 고민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원래 호모사피엔스 유전자에는 탈모 유전자가 없었다고 한다. 네안데르탈인과 유전자가 섞이면서 나타났다. 유럽에는 3만 3천년 또는 2만 4천년 전까지 살다 갑자기 사라진 이들. 추운 유럽 북쪽에 소군락을 이루고 살았고, 키가 작고 강인한 체구의, 큰 머리와 큰 코를 가진, (그리고 머리가 벗겨진) 종족은 호모사피엔스가 번성하면서 사라졌다. 만약 호모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학살했다면 탈모는 그들이 죽어가면서 현생인류에게 남긴 마지막 복수, 그야말로 빅엿이다. 하지만 가설은 너무 많다. 어쩌면 탈모는 한 네안데르탈인 남자가 한 호모사피엔스 여자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생긴, 로미오와 줄리엣 맞먹는 사랑의 결실일지도 모를 일이다.



관상학에서는 성인 남자의 머리가 벗겨지는 것을 양기를 받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즉 머리가 많이 벗겨져서 태양빛을 많은 받으면 성공한다는 것이다. 반드르르한 머리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더욱 빛나고 그 빛은 마치 그의 삶 앞에 놓인 탄탄대로의 서광이리라.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앞머리를 내린 남자에게 이젠 머리를 넘기라는 어른들의 충고는 여기서 유래된 거 같긴 하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럴싸하게 먹혔을지 모르는 이 해석은 이제 이렇게까지 자기 변명과 위안을 해야 하나 측은함과 처연한 희망만을 남긴다.



탈모는 기원전 존재가 했을 ‘저항할 것이냐 순응할 것이냐’ 또는 ‘복수냐 사랑이냐’의 문제이자 이제 ‘지금 밀어버릴 것이냐 버틸 것이냐’ 또는 '대머리 성공 신화를 얼룩지지 않을 종족의 책무'로 승화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투쟁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유전과 노화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젊은 날의 자신의 모습을 죽이고 새로운 자아로 살아야 하는 고독한 싸움은 기록되지 않았을 뿐 영웅적 서사와 다를 바 없다. 그 존재의 고민이 깊고 무거울수록 머리카락은 더 얇고 가벼워지는 것 아닐까. 고뇌하는 앞이마를 바라보면 눈물이 찔끔 날 것 같다. 그의 월계관으로 일론 머스크의 모발 이식과 한동훈의 가발 중 뭐가 더 나을까를 가늠해 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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