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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Sep 01. 2020

첫 키스의 추억

어떻게 끝났는지 생각나지 않는 건

내가 처음 사귄 남자애는 대학교 때 같은 학부 동기였다. 매일 같은 바지를 입고 있길래 물어보니까 그 바지가 마음에 들어서 교복처럼 입으려고 5벌을 샀다고 했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아서 같이 지하철을 타면서 점점 가까워졌다. 신입생들이 듣는 수업은 공통 수업이 많다 보니 더 자주 보게 됐고 그러다 보니 정말 정 들어서 사귀었다.


사귀자고 말을 했지만 그 말 전후로 우리 사이가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같이 등교하고 수업을 듣고 도서관에서 과제를 하다 저녁에는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같이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갔다. 아, 달라진 게 하나 있었다. 친구들이 없을 때 내 손을 슬며시 잡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얘가 술을 더 자주 마셨다. 뭔가 힘든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자꾸 나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술 먹고 한숨만 쉬니 내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 나한테 말해봐. 내가 너 여자 친구잖아. 그러면 술냄새가 잔뜩 나는 깊은 한숨을 쉬더니 자기 같이 못난 남자를 만나서, 미안하다고 했다. 무슨 말이야, 그게. 그럼 또 안주로 먹은 마른오징어 냄새가 잔뜩 나는 깊은 한숨을 쉬더니 자기가 가진 건 불알 두쪽밖에 없다고, 또 정말 미안하다고 했다. 도대체 그 암호 같은, 앞뒤가 잘린 문장을 해석할 도리가 없어서 나도 그냥 옆에서 한숨만 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줄곧 술만 퍼마시더니 결국 번뇌를 털어놓았다.

“사실 말이야, 나 너랑 키스하고 싶어.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더럽고 나쁜 놈 같아.”

푸흡.

"그러니까 네가 한 달 동안 그렇게 미친 듯이 괴로워 한 이유가 여자 친구랑 키스하고 싶은 너의 사악한 마음과 싸우느라 그랬던 거야?”

“......”

너무 귀여운 고백이었다. 내가 걔만큼 어려서 그게 더 귀엽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 순간만큼은 이 불쌍한 영혼을 구원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 당장 키스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어디서 하지? 우리는 부모님이랑 사는 아이들이었고 매일 가는 학교 앞 술집은 아는 사람들 천지일 텐데. 우리는 그 애 집이 있는 강변역에서 매일 헤어졌는데 그날은 조금 더 가서 잠실역에서 내렸다. 그리고 조금 더 걸어서 석촌호수로 갔다.


키스를 하기 위해 어두컴컴한 장소를 찾는 어린 대학생들이라니. 지금 생각해보면 둘이 하는 짓이 너무 어린 티가 팍팍 난다. 손잡고 어두운 쪽으로 걷는 척하면서 주변을 두리번두리번하는 모습이라니. 뭐 그렇게 우리도 모르게 동네방네 티를 다 내면서 마당놀이 공연장을 지났다. 공연이 없는 불 꺼진 야외 공연장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내가 말했다.

“지금 하자!”

그런데 그 얘가 망설인다.

“왜? 아직도 욕정이 넘치는 네가 나쁜 놈인 거 같아서 계속 망설여져?

“아니...... 그게 아니고, 너 키스해 본 적 있어?”

순간 침이 꼴깍 넘어갔다.

“응.”

사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왠지 처음이라고 말하기 싫었다. 숙맥으로 보이기 싫었다. 그리고 그 얘가 너무 긴장해 있으니까 그렇게 말해야만 할 거 같았다.

“그래? 난 사실 처음이야.”

“괜찮아.”

그렇게 우린 가로등을 피해 어둠 속으로 한발 더 깊이 들어갔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우리 둘 다 키스를 처음 하는 사람들이라 도대체 키스를 어떻게 끝내야 할지 아무도 몰랐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계속했다. 1시간 동안. 나중엔 입술이 부르트는 것 같이 얼얼했고 목도 말랐다. 이젠 끝냈으면 좋겠어서 살그머니 실눈을 떠서 그 애를 봤다. 아까 번뇌를 고백할 때 그 바보같은 표정을 하고 있나 궁금했는데 겁이 나서 얼른 다시 감았다. 눈을 마주치면 그 바보멍충이 같은 숙맥이 되살아나 나를 후다닥 밀쳐 버릴까 봐.  


내 생애 가장 길었던 키스가 이날의 첫 키스였다. 보통 첫 키스라면 순간적이고 짜릿하고 찰나 같고 두근두근하고 이런 형용사를 생각했는데, 내 것은 처음 치고는 너무 길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떻게 끝났는지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리 기억해 보려고 해도 안 된다. 키스를 하기 전까지는 이렇게 생생히 기억나는데, 왜 끝은 기억나지 않는 걸까. 그 떨렸던 심장이 입을 맞추면서 조금씩 진정됐고 긴장했던 팔다리의 힘이 쪽 빠졌다. 그 긴장감이 쪽 풀리면서 기억도 같이 힘이 풀려 버린걸까. 어쩌면 입을 맞추기 직전까지가 키스의 99.9% 아닐까. 시작은 생생한데 끝은 기억나지 않아 또 다시 하고 싶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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