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 보트에서 깨달았다. 내가 왜 바다를 좋아하는지. 물결 때문이었다. 바다 한가운데서 잠시 멈춰선 보트 아래 끊임없이 물결이 출렁거렸다. 그리고 문득, 물결의 그림자를 발견했다.흐린 날씨였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져 마치 달빛 같던 날. 그 흐릿한 햇빛을 받고 물결은 물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래,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그림자를 갖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나오는 가상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그림자가 없다. 그 세계의 성벽의 경계에서 파수꾼 역할을 하는 대장장이가 사람들의 그림자를 도끼로 베어버린다. 이것은 하나의 의식이다. 그림자를 떼어놓은 사람들은 기존세계에서 갖고 있던 기억을 잃어버린다. 그림자는 기억이었다. 내 몸이 여기를 지나갔다는 기억.
그래,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기억을 갖고 있어. 물결은 여릿한 빛이 잠깐 자신을 스쳐간 기억을 그림자에 남겼다. 물결이 모두 모두 빛으로 반짝였다면 그게 빛인지 모를 것이다. 그림자가 있기에 물결의 가장 빛나는 한순간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물결은 분명, 살아 있었다.
보트에는 많은 관광객이 있었다. 내 옆자리에는 여자애가 있었다. 눈에 띄는 아이였다. 노랗게 탈색한 머리는 푸른빛과 보랏빛이 섞여 있었고, 몸에 타투가 많았기 때문이다. 날이 흐렸고 바닷바람에 꽤 거셌는데도 민소매를 입고 있었다. 남자친구가 자신의 겉옷을 덮어줘 어깨에 살짝 걸쳤지만 소매에 팔을 집어 넣지는 않았다. 여자 아이의 타투는 강렬하고 대담한 디자인이었지만 그애의 몸을 계속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어서 무엇이 새겨져 있는지 정확하게 보지 못했다.
남자친구가 계속 옷을 입으라고 해도, 아무리 추워도 옷을 껴입지 않을 걸 보면서, 어쩌면, 만약에 어쩌면, 그 애는 그 타투를 세상에 드러내고 싶었던 것 아닐까라는 몽상에 잠겼다. 물결이 빛을 받아 지금 이 순간 어떤 숨죽이는 찬란함을 반사해낸 것처럼 지금 이 순간은 스스로 새긴 몸의 기억을 드러내지 않고는 못 견디겠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온 몸으로 자신이 살아있는 존재라는 걸 밝혀야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순간.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당신을 혼자 사랑했던 그때. 마음에 뜨거운 무언가가 꽉 차 올라 있는데 그걸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순간, 나는 죽어 있는 것 같았다. 노트든, 웹이든, 어디든, 암호 같은 문장을 써내려가며 당신이 와서 읽고 알아주길 바랐다. 그렇게라도 쓰고 나면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이 감상을 옆사람에게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
“갑자기 짝사랑했을 때 기억이 떠오른다”
“응?”
“도저히 감출 수 없는 마음을 안고 끙끙거렸던 순간이 그때인 거 같아. 뭔가 마음 속에 뜨겁고 묵직한 게 꽉 차 있는데, 어떻게 말로 표현못하니까 미칠 것 같고.”
“짝사랑이 그래서 힘들지.”
“응, 참을 수 없는 날은 미니홈피에 암호 같은 문장을 써서 은근슬쩍 내 마음을 썼거든. 그러면 그나마 내가 살아있는 것 같더라고.”
“미니홈피라니, 참 옛날 얘기다.”
“맞아. 그렇지만 생각해보니까 그때의 나는 참 흔들리고 불안했지만 가장 반짝반짝 빛났던 거 같아. 단순히 과거고 젊어서 빛났다는 게 아니고, 그림자가 깊었으니까, 그래서 더 선명한 빛이었을 거 같아."
물결의 빛은 끊임없이 변하면서 지금이라는 순간을 곧잘 과거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고 한 가닥의 찬란함만 남겨 버리는 그 허무. 내가 썼던 문장은 그 순간 찬란했지만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는 그림자를 가진 화석이 돼버렸다. 분명 내 영혼의 한 부분이 당신으로 각인되었는데, 슬프게도 그 순간은 잘 기억나지 않고 오직 초라하고 불완전한 문장으로만 남아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결은 여전히 끊임없이 움직이고 순간순간 빛나는 것처럼, 살아있다는 것은 기억하는 일이고,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슬픔까지 안고 살아야 하는 일이 우리의 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