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 충분해

우리는 순간을 충실히 살기 위해 대화를 멈출 수 없다

by 김나현

내가 불교를 처음 접한 계기는 남편을 만나면서부터이다. 어린 시절 세례명 마리아에 나름 자긍심을 느끼며 열심히 성당을 다니던 아이는 6학년이 되자 매번 쪽지 시험을 보는 따분한 교리 공부에 질렸더랬다. 그리고 저 멀리 있는 신의 존재보다 당장 '나'라는 자아가 더 시급한 문제로 닥친 사춘기가 오면서 점점 신앙생활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딱히 믿는 종교 없이 지내다가 20대 중반 그가 나에게 현각 스님의 책을 추천해주면서 불교에 살짝 입문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그전까지 불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아는 거라곤 '산사의 부처상 앞에서 절하면서 소원을 비는 종교'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는 토착적인 기복 신앙과 결합된 한국식 불교의 일부 모습이며 원래 불교에는 신이 없다. 이 사실을 처음 알고 종교에 신이 없다는 말이 꽤 충격적이었다. 다른 종교가 기도를 통해 전지전능한 신에게 구원을 바라는 데 비해 불교는 그런 종류의 구원은 없다고 본다. 구원은 스스로 이뤄내야 하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신이 아니라 단지 먼저 깨달은 자로 일종의 롤모델인 셈. 자기 스스로 이뤄내야 하는 구원이란 결국 해탈이며 이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고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 수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삶이란 평생 깨달음을 위한 여정인 것이다. 인간 내면의 성찰의 힘을 믿는 이 불교적 삶의 방식에 나는 매혹됐다.


하지만 이렇게 맛만 봤을 뿐 여전히 불교적 삶을 살지는 못하는 무지몽매한 중생의 삶을 살고 있다. 특히 나는 전생과 이생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내가 자꾸 전생에 집착하니까 남편은 지금의 내 모습에 답이 있을 거라고 하지만 이 대답은 너무 어렵다. 차라리 중학교 때 친구들과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전생 체험 테이프를 구해서 다 같이 방바닥에 누워 집단 전생 체험을 했을 때 내 안에서 떠올랐던 이미지가 더 쉽고 그럴싸하다.(하지만 이 전생 테이프는 할 때마다 이미지가 바뀌었다.) 때론 출근길 지하철에서 때론 낙엽을 밟다가 때론 설거지를 하다가도 문득문득 궁금해진다. 나는 누구였을까. 이렇게 매번 전생과 다음 생에 집착을 하니 나는 평생 해탈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다만 실천하고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순간경'이다. 지금 이 순간에 소중함을 담고 있는 경(經)이다. 파란 눈의 스님으로 알려진 현각 스님은 가장 좋아하는 경이라며 순간경을 이렇게 말했다.

"순간경! 커피 향을 맡는 순간, 재즈를 듣는 순간, 걷고 이야기하고 시장에 가는 모든 순간, 뺨에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친구와 악수를 하면서 감촉을 나누는 순간, 순간, 순간…"

순간 안에 깨달음이 있다는 말이 처음에는 참 낭만적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현재를 충만하게 즐길 수 있으려면 그만큼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더 시간이 흐르니 그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는 결국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순간을 가리는 허영과 가식을 던져 버리는 용기. 세상의 흐름과 달라도 그 길을 받아들일 용기. 그에 따르는 희생을 감내할 수 있는 용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졌고 또 의지와 상관없이 결국 죽을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의지와 무관한 삶과 죽음 사이에서 하루하루 의지를 갖고 살아야 한다. 멀리서 보면 삶-죽음이라는 과정이 허망하기 짝이 없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하루하루 순간을 충실히 살아내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천리 길을 내다보지 못하는 우매한 중생인 나는 오늘을 충실히 사는 것 이외에는 더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하지만 겹겹이 쌓인 순간이 내면에 아로새겨지면서 깨달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지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비록 거대한 업적이 아니더라도 세상 어딘가에 내 순간의 발자국 하나 남기려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억만겁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달에 찍은 인간의 발자국이나 내가 세상 어디 남겨 놓은 발자국은 결국 비슷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우리 부부가 순간을 즐기는 비법이 하나 있다. 바로 대화다. 우리가 서로를 꽤나 마음에 드는 친구로 여기는 것은 대화 덕분이다. 연애할 때도 대화를 참 많이 했다. 전화통화 1시간은 기본이었는데 나중에는 수화기를 댄 한쪽 귀가 아파서 이어폰을 꽂아야 했다. 통화료 때문에 아예 인터넷 전화기를 따로 설치했을 정도. 그러던 중 무슨 일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수다 떠는 일에 좀 소원해졌던 적이 있다. 그는 우리 사이에 교감이 부족해졌다며 서운함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마침 그의 집에 팩스기를 새로 설치했다며 한번 시험해보게 뭐라도 보내보라길래 그의 마음을 풀어주고자 이런 그림을 그려 보냈더랬다.


KakaoTalk_20180926_221332248.jpg 교감이 아닌 교장을 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유치찬란한 손그림


교감을 넘어 교장!ㅋㅋ 남편은 내 못난 그림에서 교장 선생님의 대머리 디테일에 만족해하며 마음을 풀었다.

'교장'의 다른 예를 좀 들어볼까 싶다. 좀 닭살 돋는 대화이지만 어느 날 데이트를 앞두고 우리 집 앞으로 오기로 했다. 그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나는 그에게 집 앞에서 까치를 봤다는 문자를 보냈다.


나 : 나 아파트 앞에서 까치 봤어~ 반가운 손님이 오려나 ㅋ

오빠 : ㅎㅎㅎ 고전적인걸?

나 : 근데 까치가 이쁘더라고~ 빛깔이 고와~

오빠 : 후후, 오빠 만나는 날이라서 그런갑다.

나 : ㅋㅋ 오빠의 멘트 역시 지극히 고전적인데~

오빠 : 그렇구려, 낭자!

나 : 도련님, 소녀를 위하여 까치 한 마리를 보내셨나이까!


이런 닭살 돋는 카톡질을 하던 중 만담 놀이가 되었다. 낭자와 도련님까지 나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는 이걸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닌 걸로 만들었다.


오빠 : 내 그대를 그리는 마음 지극하다 하나, 어찌 사람이 금수를 마음대로 부리겠소. 다만 까치가 낭자에게 나를 잠시 데려다주었구려.


물론 콩깍지가 쓰여서겠지만, 그는 이렇게 내 마음을 잘도 흔들어 놓았다. 여기까지만 봐도 그의 대화 내공이 상당하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데이트 시간이 다 되어 잘 오고 있냐고 카톡을 보내자 차를 몰고 저 멀리 남양주에서 용인으로 오고 있는 그는 이렇게 답했다.


오빠 : 오라비는 나귀 타고 재를 넘어 월하정인 만나러 가고 있구나.

신윤복의 월하정인

이날 내가 까치 한 마리 봤다는 말 한마디를 이런 대화로 승화시킨 남자다.

그저 사소한 대화였지만 그날 내 마음은 이미 기쁨으로 충만했다. 그 까치를 본 찰나의 순간이 영원히 아름답게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그 순간 충실하게 대화했기 때문이리라.


“지금으로 충분해.”

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것. 지금 이 순간 행복을 느끼는 것. 가을 하늘빛에 감탄하고 그 감정을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것.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그 내면을 들여다 봐주는 것. 지금에 충실하면서 행복을 느낀다. 어차피 영원한 행복이란 없다. 이 또한 잠깐 지나가는 감정이니까. 매 순간 행복은 다 다르다. 그러니 순간의 행복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묵언 수행은 금물이다. 밖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흐물흐물해져서 집에 돌아오면 남편에게 미주알고주알 밖에서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고 나면 다시 기운이 샘솟는다. 내 얘기를 다 들어주고 언제나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어디서든 당당해질 수 있다. 대화가 서로를 일으키고 어루만진다. 매 순간을 충실히 느끼고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대화를 멈출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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