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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씩씩 Jul 02. 2018

연애 관계에서 '을'로 산다는 건

'오늘은 바빠, 다음에 봐'라고 말하고 싶어

 

이 사람과 사랑에 빠질지 빠지지 않을지 감이 온다 감이 와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빠른 사람이다. 좋아하는 마음을 부정하려고 애쓰지도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냥 편하게 말한다. '요즘 이 사람한테 꽂힌 것 같아.' 누군가에게 꽂히는 게 흔한 건 아니라, 그런 말을 하는 건 흔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요즘은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꽂혀서, 가까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한 적도 없고, 운명적인 만남을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는 늘 사람을 처음 만나고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사랑에 빠질지 빠지지 않을지를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아, 나는 이 사람과 사랑에 빠질 게 분명해' 정도의 강렬함은 아니더라도, '이 사람 좀 괜찮은데?' 싶고, 그 사람과 더 연락을 이어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경우엔 그 마음을 오래 품게 될 때가 많았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것은 순식간이지만, 그렇게 좋아하게 된 마음은 오래오래 품고 있는 이상한 사람. 그게 나였다.
  

마음의 온도를 잴 수 있는 온도계가 있다면 당장 살 텐데



   얼마 전 만난 친구에게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이 60 정도였으면, 지금은 10 정도로 식은 것 같다고. 애초에 100 이상으로 끓어 오를 만큼 좋아했던 것도 아닌데, 그 사람과 정말 별스럽지 않은 관계였고 흔히들 '썸씽'이라고 말하는 그 어떠한 무언가가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아직까지 10이나 남아 있는 게 신기하다고 친구는 말했다. 넌 진짜 누군가를 한번 좋아하기 시작하면, 오래 좋아하는구나. 전 연인에게 오래 마음을 품었던 과거를 알기에 하는 말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진짜 한번 좋아하면 오래 가는 것 같아. 한번 꽂히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나는 그날 그 친구에게 그렇게 답했고, 오늘은 그 말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던 날이었다.


꿈의 세계....알 수 없다.....그 사람 좀 그만 나와 줘...


   오늘은 전 연인이 꿈에 나온 날이었다. 그 사람이 꿈에 나온 건 벌써 몇 번째지, 헤어지고 나서 그 사람은 꿈에 꽤 등장했다. 우린 여전히 서로의 인스타 좋아요를 눌러주는 사이였다. 그리고 가끔은 그 사람이 댓글을 달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기대하는 날도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요즘은 자꾸 그 사람 생각이 났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그 사람이 하는 일이랑 너무나 닮아 있어서, 한참 전부터 그 일을 했던 그 사람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변명이고 핑계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분야에서 어느 정도 인정 받고 있는 사람이니, 내 고민들에 대해 의미 있는 조언을 해 줄 수 있을 텐데. 그 사람이랑 이야기를 하고 나면 쓸 만한 인사이트를 많이 얻어올 수 있을 텐데. 그건 사실일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을 보고 싶은 게 정말 순수하게 인사이트를 얻고 싶어서야?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봤고 이렇게 시간이 오래 흘렀는데 그러면 그 이상의 감정이 뭐가 남아 있겠어, 나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답했다. 그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 그저 내가 동경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잘하고 있는 그 사람과 다시금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은 남아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친구였다면 벌써 몇 번을 연락했겠지만 우린 그냥 친구는 아니었으니까, 이런 일로 그 사람에게 오랜만에 연락하는 건 이상한 일이야. 이상한 게 아니라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관련된 이야기를 하루종일 하고 관련된 고민을 멈출 수가 없던 날, 나는 자꾸만 그 사람 생각이 났고 자꾸만 연락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시간이 꽤 흘러서, 순간적으로 연락하고 싶은 충동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오늘의 꿈에서는 별 일은 없었다. 꿈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SNS에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있던 우리는, 꿈 속에서도 실제로 만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오랜만에 그 사람의 SNS에 댓글을 달았던 것 같고, 뭐 어떻게 댓글이 진행되어 그럼 오늘 만날래? 이런 식의 진행이 되었던 것 같다. (그건 전부 어제 자기 전에 그 사람의 SNS에 그런 류의 댓글이 달린 것을 본 것의 영향이다) 뭐 그렇게 해서 만났는지 안 만났는지는 잘 생각이 안 나고, 알람 때문에 꿈에서 갑작스럽게 깬 나는 꿈과 현실이 잘 분간되지 않았다. 일어나자마자 양치를 하면서 오늘 꿈에 남자가 나왔던 것 같은데, 누가 나왔더라 잠깐 생각하다가 아, 그 사람이네를 인지하자마자 조금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 사람을 아직도 만나고 싶어? 그 사람이 오늘 만날래? 하면 너는 또 만나러 갈 거야? 아직도?
  

답은 정해져 있다 알면서도 실천을 못할 뿐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는 왜 이렇게 힘이 없지. 좋아하는 사람이 만나자 하면 '왜 나는 오늘 바빠, 다음에 만나'라는 말도 못하는 거지. 심지어 그 사람은 지금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잖아, 너는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잖아. 물론 그 사람이 실제 그 말을 해 온 것도 아닌데, 나는 쓸데없이 그런 고민에 빠졌다. 갑작스럽게 그 사람이 '오늘 만날래?' 그렇게 물어온다면 나는 아마 '그래!'라고 답할 것만 같았다.  연애 관계에 있어서마저 갑을을 나누고 싶지는 않았지만, 연애에 있어 갑을은 어쩔 수 없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왜 그 사람에게 단 한 번도 갑이 될 수가 없는 거지. 정말 연애 초기에 잠깐 그랬나. 먼저 좋아한 쪽도 나였고 더 오래 좋아한 쪽도 나였기에, 나는 언제나 그 사람에게 을일 수밖에 없었다. 갑이 되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 편하게 No를 한 번쯤은 말할 수 있으면 좋잖아. 고민 없이 단호하게 No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잖아. 나는 약속이 없는 날은 물론이고, 중요하지 않은 약속일 경우에는 그 약속을 미루거나 가지 않으면서까지도 아마 Yes라고 답할 것 같았다. 머리로는 아닌 것을 알면서도, 지난 경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결국에는 그렇게 행동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 을의 입장으로 사는 건 이제 지긋지긋했다. 더군다나 내가 그 관계에서 철저하게 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 그 사람이 만나자고 하지 않을까?'라는 헛된 기대를 품는 건 더 지긋지긋했다. 만약 내가 그랬더라면 달랐을까, 혹시 이번에는 다르지 않을까, 만약에와 혹시를 반복하게 만드는 관계 속에서 얼마나 많은 감정을 소모했던가.

   그렇지만 누군가에겐 나도 그런 '혹시'와 '만약에'를 그리게 하는 사람이었겠지. 누군가에겐 나도 무조건 Yes를 하게끔 만드는 사람이었겠지. '혹시 저 사람이 만나자고 하지 않을까?'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별의별 핑계를 다 대고 '혹시 시간 있어요?'를 물어 왔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말을 꺼내는 게 마냥 쉽지만은 않았을 것을 알면서도 너무나 가볍게 No를 말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반나절에 한 번씩 별 의미 없는 답장을 보내는 나에게, 매번 10분 이내에 답장을 보내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나절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그 사람은 '혹시'와 만약에'를 몇 번씩 그렸겠지. 그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면서도 단순히 할 말이 없다, 지금 당장 보내기 귀찮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내키는 대로 연락을 지속하던 관계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고, 또 자기 중심적이다. 잔혹하게도 나는 그 모든 순간들과 관계들은 잊어 버리고, 내가 애타고 내가 기다렸고 내가 상처 받은 순간들만을 기억한다.
  
   오랜만에 꽂혔다는 그 사람과 같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번 만나고 카톡을 하면서 수없이 확인했다. 아, 이 사람은 나에게 그 어떤 마음도 없구나. 예전에는 혹시나 하는 기대가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아닌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싶었다. 내가 그냥 예민한 건 아닐까. 나야 원래 한 마디를 해도 따뜻하게 보내고 구구절절 길게 쓰는 편이지만, 그 사람은 그냥 할 말만 하는 타입인 건 아닐까.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해서, 별스럽지 않은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상심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합리화를 해 보려 했지만,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 마음이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을. 나를 미워하지도 않지만, 그렇다 해서 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무 감정 없는, 그냥 아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모든 현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람의 마음을 확인할 때마다 조금은 마음은 시렸다. 뭘 기대해, 다 알면서. 다 아는데 뭘 기대하는 거야 도대체. 기대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데 자꾸만 기대를 품는 내 자신을 탓했다.

   예전의 나는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기대하다가 기대에 못 미치면 상처 받는 순간이 싫어서 아예 기대 자체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요즘의 나는 자꾸만 무엇인가를 기대한다. 기대하지 말아야 할 너무나 작은 것들에서도 자꾸만 기대를 키우고, 그래서 마음이 시릴 필요가 전혀 없는 상황들에서도 마음이 시리다. 마음이 도대체 왜 시려. 그 사람이 너의 카톡에 무응답을 하길 했어, 널 무시하기를 했어, 뭘 했어. 답도 했고 장난도 쳤고. 그 대답이 길지 않아서 마음이 시려? 그 장난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치지 않았을 것만 같은 장난이라서 마음이 시려? 그 사람을 그렇게 잘 알아?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게 마음 시릴 일이야? 아니라는 것을 다 알면서도 마음이 시렸다. 몇 주 전만 해도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마음 시리는 기분이 너무 오랜만이라 그 기분마저도 반가웠는데, 오늘은 그 시답지 않은 마음 시림이 싫었다. 그리고 그 기분을 너무나 멈추고 싶었다. 나는 을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그 사람에게 그렇게 오래도록 을이 되는 기분을 느끼고 나서, 다시는 을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왜 나는 또 그 기분에 시달리고 있나. 이제 이만큼 했으면 그냥 포기하고 을이 되는 기분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런 마음을 느끼냐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사람 마음이 마음대로 되었으면 진작에 이 개미지옥 같은 '을' 자리에서 탈출했을 테다. 원래 인생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아서 재미있는 거지, 마음대로 안 되는 내 인생을 조금은 더 사랑해 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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