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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씩씩 Jan 30. 2018

한겨울의 아이스크림

내가 할 수 있는 위로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라는 별 시답잖은 말뿐이지만

  슬픔을 잘 다루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위로를 적절하게 건넬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진부하고 뻔한 위로를 과장되게 건네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민만 하다 위로의 타이밍을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마냥 가볍지도 않고, 마냥 무겁지도 않은, 진심을 담은 위로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내가 겪은 슬픔이 아니기에,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슬픔과 괴로움이지만 조금이라도 그 사람의 슬픔이 덜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면, 무슨 말을 건네야 하는 걸까.  사람들이 슬픔을 털어놓는 밤이면, 늘 이런 고민을 했다. 아무 일도 아닌 척, 별 일 없는 것처럼 말해 오는 상대일수록 더 어려웠고, 내가 알 수 없는 슬픔의 부류일 때는 섣불리 말할 수 없어 더 어려웠다. 가끔 단톡방에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면, 다 보고도 읽지 않은 척하면서 다른 이들의 위로를 엿볼 때도 있었다. 한참의 위로가 오가고 그 사람의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된 뒤에야 겨우 한 마디를 꺼냈던 적도 많았다. 그때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따뜻한 위로를 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위로를 적절하게 건네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늘 생각했었다.

힘내라는 말에 왠지 기운이 빠지는 때가 있지, 가을방학 - 호흡과다 (출처: 난장문화콘서트)

                                             
  여전히 위로는 어렵다. 무작정 '좋아질 거야, 괜찮을 거야'라는 말은 기운만 빠지는 것 같고, '힘들었지, 그래도 너무 힘들어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라는 말은 무책임한 것 같다. 그럴 듯한 해결 방안을 찾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 나에게 마음을 열어준 건 늘 고마운 일이기에, 그만큼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 주고 싶은데, 그만큼 힘이 되는 사람이 되어 주고 싶은데,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쁘지 않은 위로법을 찾았다. 위로를 건넨 당사자에게 그 말이 위로가 되었냐고 직접적으로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니, 사실 나쁘지 않은 위로법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렇지만 적어도 누군가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네 준다면, 고맙고 마음이 따뜻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같이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우울하고 마음이 복잡할수록 단순한 것들이 돌파구가 되었을 때가 많았다. '아, 지금 행복하다'를 자각하는 순간들도 참 별 거 없는 순간들이었다. 추운 겨울날 마셨던 달달한 핫초코 한 잔에, 뭔가 허전한 새벽에 먹었던 컵라면 하나에 '아, 행복해'라는 말을 되뇌이곤 했으니까.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효과가 가장 확실했던 건 아이스크림이었다. 얼마나 기운이 없고 처지는 날이었든, 얼마나 우울하고 싱숭생숭한 날이었든, 아이스크림을 먹는 그 순간만큼은 즉각적으로 행복감을 느꼈다. 차갑고, 부드럽고, 달콤하고. 아이스크림이 지니는 확연한 온도 차이는 언제나 짜릿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오래 맛을 음미할 필요도 없이 베어물자마자 '아, 행복해'라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 그 행복 앞에서 아이스크림 칼로리가 얼마나 높은지 알고 있냐, 밥 먹고 바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건강에 해롭다는 말 같은 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딜 가나 있는 젤라또 집은 유럽 여행의 큰 낙이었다


 물론 평소에는 먹을까 말까 수없이 망설일 때도 많았지만, 우울한 날만큼은 달랐다. 기운 빠지고 우울하고, 쓸데 없는 생각들이 자꾸만 밀려와서 더 이상 무엇인가를 못하겠다 싶은 날이면, '아이스크림 하나 먹고 하자'라는 결정을 내렸다. 아이스크림 하나 먹겠다고 밖으로 나가서, 바깥 공기도 쐬고 걸어가다 보면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었다. 다른 고민들은 제쳐 두고, 슈퍼를 갈까, 편의점을 갈까, 패스트푸드점을 갈까 등 참 단순한 고민에 빠지는 것도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오늘 기분엔 이걸 먹는 게 낫겠어, 혼자서 별스럽지 않은 결정을 내리고서는 뿌듯해하기도 했고. 그렇게 선택한 아이스크림을 들고 돌아오는 길이면, 잠깐이라도 우울함이나 복잡한 생각들을 잊을 수 있었다. 사실 잊는 정도가 아니라, '아, 행복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정도. 1000원 정도만 투자하면 얻을 수 있는 행복 치고는, 꽤 근사했다.


가장 사랑하는 요맘때 콘과 그 친구들



 적어도 나의 경우엔 그랬다. 나에겐 아이스크림이 어떠한 경우에든 통하는 일종의 만병통치약이었기에, 아이스크림은 꽤 근사한 위로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이스크림집 딸은 아니지만, 조심스럽게 위로의 끝에 아이스크림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오히려 우울하고 마음이 복잡한 날에는 단순한 접근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예를 들면 아이스크림을 먹는 일 같은 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무거운 위로의 말만 전하면 너무 진지하고 무겁게 느껴질지도 모르니까, 가벼운 빛을 조금은 덧입혀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 않는 상대에게는 그닥 매력적인 위로법으로 다가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이것저것 많은 말을 해 놓고 결국엔 아이스크림을 먹으라는 시덥잖은 결론을 내린다면, 그 실없음에 조금이라도 웃음 지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진심으로 위로가 되어 주고 싶은데, 진심으로 네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적절한 해결 방안도 모르겠고 적절하게 도울 방법도 모르겠어. 최대한 공감하려고 노력했는데, 사실 내가 잘 아는 분야가 아니다 보니까 잘 공감을 해 줬는지도 모르겠어. 내가 할 수 있는 위로는 아이스크림 먹으라는 별 시답잖은 말뿐이지만, 그래도 내 위로가 너에게 잠깐의 웃음이라도 되어 주었으면. 진심으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등등의 구구절절 긴 마음은, 아이스크림을 먹는 건 어떠냐는 짧은 문장에 담겨 있었다. 그 마음이 전달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쓰다 보니 '아이스크림을 먹어 보는 게 어때?' 대신 '같이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래?'라고 말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한 날, 함께 있어 주고 싶은 마음까지 보태서. 그러니 한겨울에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래? 라고 권유한다고 해서 너무 매몰차게 거절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한겨울에 먹는 아이스크림도 생각보다 근사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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