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씩씩 Dec 24. 2017

수고했어요, 정말 고생했어요

그댄 나의 자랑이죠

 

하루의 끝에 듣는 하루의 끝


오늘의 선곡: https://www.youtube.com/watch?v=wGP-gfCWXYI

수고했어요, 정말 고생했어요 그댄 나의 자랑이죠


1. 진짜 오랜만에 눈물이 났던 것 같다. 나는 아직 이름 앞에 붙은 故라는 한자도, 사망이라는 두 글자만봐도 마음이 쿵하는 기분이다. 아무리 보아도 잘 붙지 않는다. 국화꽃 사이에 파묻힌 밝은 웃음의 모습도. 그냥 밤에 그 사람을 추모하는 사람들의 글을 보면서 계속 눈물이 났다. 무슨 지점에서 감정이 동했는지도 모르겠다. 팬도 아니었는데, 그냥 자꾸 눈물이 났다. 이유를 찾으려 했지만 잘 모르겠더라.


 사람 목숨이 허망하다. 그냥 그래도 일상은 지속된다. 순댓국을 먹다가 입천장을 온통 데었고, 추위에 손을 잔뜩 움츠리고 그렇게 걸어간다. 그냥 어제오늘은 다른 노래를 듣고 싶지 않아서, 주구장창 두 곡을 반복해서 들었다. 죽음도 이별도 모두 서툴다. 나는 주변의 모든 게 있으리라 생각하고, 나의 여유를 지켜서 주변을 돌보고 싶었는데. 그냥 안아주고 싶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선택까지는 안 하도록, 꼭 안아주고 위로를 건네주고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존재였으면, 그런 생각을 했지만 막상 곁에 있으면 그 우울을 감당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떤 우울이든 강하게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서, 공감할 수 있고 내 이야기를 꺼내오는 우울은 금방 동화되는 사람이라서. 어느 순간엔 감당하기 힘들어했을지도 모르고, 생각보다 짙은 우울에 무슨 위로를 건네줘야 할지 몰라서 종종거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 종종거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로가 되어주는 것을 알기에, 종종거려줄 자신은 있는데. 아무리 동화되고 괴로워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면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어 애썼을 것이다. 그게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울한 순간들에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건 언제나 사람이었다. 그 사람들에게 늘 고마웠다. 그 사람들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있어서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일도 돈도 명예도 살아가는 이유가 될 수는 없었지만, 사람은 될 수 있었다. 언제나 되어주었고.


 아무리 들어도 잘 믿기지 않는다. 그냥 그런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꿈을 다시 살리고 싶다고. 사람들이 우울을 터놓을 수 있는 창구를 만들고 싶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눈을 마주치고, 조용히 들어주고 싶다. 그 이야기를 잘 다듬어 전달할 방법을 고민하며 살고 싶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다. 살고 싶어지는 건 참 별스럽지 않은 순간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2. 요즘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봤다. 사실 잠들었다 일어나 보기 시작한 것이라, 과정은 보지 못하고 딱 마지막 순간만 보게 되었지만. 엄마의 죽음을 다룬 이야기라는 것을 파악하자마자,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보지 말고 그냥 잠을 더 잘까 하다가, 잠이 오지 않아서 잠깐 마지막을 보았다. 죽음이 뭔지도 모르는 아이, 혼자서 웃으며 천진난만하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아이를 보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그런 아이를 남기고 떠나야 하는 기분이 어떨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어서. 남는 사람보다는 떠나는 쪽이 낫지, 몇 시간 전에 그런 생각을 했지만 또 그런 것만은 아니구나 생각했다. 떠나는 쪽에게도 남는 쪽에게도 이별은 슬픈 일이로구나, 생각했다. 슬프다는 짧은 단어, 아주 기초적인 단어만으로는 표현이 불가할 정도로. 늘 좋다, 슬프다 같은 기초적인 단어를 쓰게 될 때면 이 단어 말고 다른 단어가 없나 한 번씩 더 생각하게 되었다. 이 기초적인 단어만으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 감정을 느낄 때, 꼭 좋다, 기쁘다 혹은 슬프다 같은 표현을 쓰게 되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딱히 대체되는 단어도 없는 것 같다. 뭐 별 수 있나, 써야지.  


 그 와중에 TV에서는 또 다른 죽음을 다룬 소식이 전해졌다. 그냥 평소에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 이 문장에 대해 별 감흥이 없었는데 (물론 평소에는 죽음에 대한 주제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요즘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쉽게 꺼내지 못하겠다. 누군가가 죽었대, 주변 사람들의 입에서 죽었다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덜컹거렸다. 뉴스에서 사망이라는 단어, 故라는 한자를 접할 때에도 늘 마음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죽었다, 라는 말도 그랬다. 일상적인 말들은 아니지만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리저리 많이 접했던 단어인데, 요즘만큼 이 단어들이 낯설고 마음을 내려앉게 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요즘만큼 자주 생각했던 적도 없었고. 속보로 전해지는 소식을 보면서, 그냥 또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슬프다고도 말하기 어려운 죽음. 준비가 되지 않은 마지막. 준비해도 어려운 마지막을, 준비하지 않고 맞이하게 되면 어쩌지.  


 문득 사랑하는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게 너무 많아서, 이 모든 것을 두고 떠나는 것도 두렵고 이 사랑하는 것들이 떠나가는 것도 너무나 두렵다. 생각해 보면 별 것도 없는 일상인데, 또 떠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하나하나 집착하고 놓고 싶지 않다. 물건 하나도 제대로 못 버리겠는데, 별 것 아닌 물건이 아니라 그냥 인생 전반을 놓고 본다면 도대체 뭐를 놓을 수 있겠어. 어떻게든 다 잘 챙겨서 살아가고 싶어서, 챙길 정도의 삶의 여유는 가지고 살아가야지 이런 생각을 늘 해 왔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떠한 노력도 속수무책이잖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그 마지막은 갑작스러울 수 있구나, 그렇게 멀기만 한 게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늘 실감 나지 않았던 존재가 갑자기 실감이 나기 시작한 기분. 그래서 죽을 날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늘 죽을 때 되면 죽어야지, 이런 식의 태도로 일관하던 사람들도 삶에 대해 집착하게 되는 건가, 싶었다. 막상 실감이 나기 시작하면 놓기 싫은 것들이 자꾸만 떠오르게 되어서. 어떤 인생을 살았든 사랑하는 순간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므로. 놓고 싶지 않은 순간, 마음에 걸리는 순간, 사람들, 대상들.  


 그냥 연말이 다가오면서, 두려운 게 많아진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은 두려운 게 많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냥 소중한 것들이 사라질까 두려워. 나는 늘 나에 대해 생각했고, 소중한 것을 잃지 않기 위해 내가 노력하면 잃지 않을 수 있을 거라 은연중에 생각해 왔던 것 같다. 그렇지만 변수가 너무나 많은 세상이라서, 내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구나, 싶다. 늘 언제나 그랬다. 내 개인의 노력으로 커버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은 두렵지 않았는데, 나의 선을 벗어나는 것들은 늘 두렵고 불안했었다. 예전엔 내 선을 벗어나는 게 새롭게 맺는 인간관계 정도에 불과했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새로운 관계는 개인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는 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젠 과거엔 개인의 노력으로 가능하다 생각했던 능력적인 부분들이, 단순히 노력으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구나 싶어졌고. 물론 노력도 중요하지만 뛰어넘지 못할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노력으로도 극복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두려움과 불안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렇지만 가장 큰 두려움과 불안은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 지키려 노력해도 갑작스러운 변수가 나타나 이것들을 앗아갈까 하는 두려움. 그 변수라는 게 두렵다. 그 갑작스러운 변수가 딱히 생기지 않을 거야, 생각하기에 안정적으로 잘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가끔은 그런 게 나타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생길 때가 있다. 이 사랑하는 것들을 붙잡고 살아가는데, 이것들이 없어지면 어쩌나 하는. 그리고 요즘 들어 그 변수가 마냥 멀리만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지만 두려움과 불안보다는 할 수 있는 선에서 잘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드는 요즘이다. 오늘이 삶의 마지막 순간일 수도 있으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살자, 이런 식으로 힘을 주어 살겠다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이런 마인드는 더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그냥 욕심 없이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하나의 목표에 너무나 집착하고, 맹목적으로 매달리고 싶지 않다는 느낌. 작은 순간들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며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순간들을 자각하면서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나가는 순간들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의미 있는 순간들을 많이 만들어 내는 데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순간들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삶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게 여전히 많으면서도 동시에 욕심 없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아이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세상을,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해. 그래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할 때마다, 세상에 대한 무력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져. 대단하고 거창하게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조금은 더 살 만한, 개개인에게 잠시라도 행복을 줄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 내고 싶어져. 살고 싶어지는 건 참 별 것 없는 순간 덕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창구를 만들고 싶고, 눈을 마주하고 진심으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어.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 닿을 수 있을지 고민하며, 표현하는 방식을 생각하고 싶어. 그리고 그 이야기가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닿아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어. 참 이 이야기를 많은 자소서에 썼지만, 여전히 써먹으면서도 요즘은 그 강렬함이, 진심이 많이 약해졌다는 생각을 했지만, 요즘에 들어서 다시 강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나는 그런 것들을 만들어 내고 싶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20171017 어떻게든 흘러가겠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