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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씩씩 Aug 22. 2019

떳떳하게 카페 옆자리 대화 엿듣기, <더테이블>

정유미 정은채 한예리 임수정 - 더 말이 필요한가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pisode 1
오랜만에 만나서 나도 네가 눈치가 없다는 게 새삼스럽다 얘!


 여기, 지난 연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한 여자가 있다. 시간이 흘러, 여자는 카페 유리창 너머의 사람들이 알아보고 손을 흔드는 배우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남자는 그런 여자가 자신의 연인이었다며, 직장 동료들에게 떠벌리고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하는 회사원이 되었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앞에 두고, 찌라시가 진실이냐 조심스러운 척 (하나도 조심스럽지 않았으면서) 묻고, 동료들이 연인이었던 것을 안 믿어준다고 사진 같이 찍을 수 있냐고 물으면서도 떠벌리고 다니지 않는 척(절대 자랑하거나 그런 건 아니고, 친하고 가까운 사람들한테만 말한다는데, 왜 회식 자리에서 "야, 내 전여친이 누구였는 줄 알아?" 하는 장면이 그려지는지) 하고, 카페 앞에 삼삼오오 모여 수군대는 직장동료들을 우연히 마주친 척(그래, 퍽이나 우연이겠다) 하는.


 여자는 내내 씁쓸하게 긍정을 한다. 씁쓸하다기보다는 영혼이 없다는 쪽에 더 가까우려나. '그래, 이 인간은 원래 이랬지. 이 인간에 뭘 기대를 했나.' 이런 느낌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아쉽다는 말에도 자신도 아쉽다고, 다음에 연락해도 되냐는 말에 그럼, 연락해도 된다고. 말투와 표정을 잃은 그 말들은 문자로만 남아, "아, 금방 헤어지긴 했는데, 걔도 아쉽다더라.", "다음에 또 연락해도 된다던데? 걔도 뭐, 좀 아쉬운 구석이 있었나 보지." 이런 '아 다르고 어 다른' 말로 변질되어 전해지겠지. 그 말을 들은 타인들은 "아니, 팀장님, 아직도 팀장님한테 마음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러게요, 여자들은 마음 없는데 그렇게 여지 안 줘요" 그 말에 새로운 말투와 표정을 덧입혀 해석할 것이고, 다시 그 말을 들은 남자는 "야, 걔가 요즘 얼마나 잘 나가는데. 내가 뭐가 좋아서." 같은 말을 덧붙이면서도 실실 웃겠지. "아니, 팀장님 정도면 괜찮죠, 연예인들만 만나다 보면 또 질릴 수도 있잖아" 이런 아부가 덧붙을지도 모른다.


 전 애인을 지나간 사랑으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과시용으로 소비하려고만 들었던 남자에게, '그저 유명해진 여배우가 나의 전여친이었고 지금 카페에서 대화를 할 정도의 사이다'라는 사실만이 중요했던 남자에게, 애초에 여자의 표정이나 말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으면 뭐하나. 말투도 분위기도 표정도 읽지 않을 거면, 굳이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을 필요가 없는데. 니가 찌라시랑 뭐가 다르냐, 상황 맥락 분위기 하나도 읽지 않고 사진 하나에만 집착하는 주제에.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읽고 싶은 생각도 없으면서. 드라마를 본방사수하면 뭐하냐, "아, 그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가 내 전여친이잖아" 말하고 싶어 근질거리는 입을 열어줄 수단에 불과할 텐데.


 관객으로서도 쏟아내고 싶은 말이 이렇게 수없이 많은데, 여자는 아주 깔끔하다. 사진도 찍어주고, 아쉽다고도 말해주고, 다음에 연락해도 된다는 말에도 긍정하고, 나오는 드라마를 봐 달라고도 부탁한다. 물론, 나 이제 가봐야겠다고 말하며 일찍 자리를 뜨긴 했지만. 말해봤자 변할 것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시간이 흘러도 그는 그렇게나 제자리다, 그녀는 이렇게나 변했는데.



Episode 2
그렇게 진도가 빠르더니....


  여기, 긴 여행을 떠나 놓고 연락 한 통 없던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여자가 있다. 인도도 가고, 체코도 가고, 프랑스도 가고, 세계를 휘젓고 다녔으면서 사진 한 장 안 보냈다. 그렇게 진도가 빠르더니.. 연락은 이렇게 느리게 올 일인가. 새해 인사를 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시기가 되어서야, 그 해 처음으로 만났다. 내내 눈을 피하고 다른 쪽을 바라보다가, 어쩌다 한 번 남자와 눈을 마주치는 여자가 있고, 내내 몸을 앞으로 쭉 빼고 동그란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가 있다.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려는 남자와, 어떻게든 시비를 걸고 대화에 맥 빠지게 하고 싶은 것처럼 보이는 여자가 있다. 관객 입장에서 그럴 거면 그냥 끝내라 끝내!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저렇게 둘 다 답답하게 굴 거면, 그냥 끝내라 끝내!


  그냥 끝내고 싶어진 건 관객만이 아니어서, 여자 또한 기분이 상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야겠다고 말한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붙잡는다. 이것까지도 아주 진부하다. 그렇게 할 말 없이 붙잡을 거면 끝내라고! 그런데, 남자가 갑자기 주고 싶은 게 있어 연락했다면서, 뭔가를 꺼낸다. 그렇게 시계를 꺼내 채워주고, 그 정도만으로도 마음이 샤락 풀어질 무렵, 그가 가방에서 연달아 무언가를 꺼낸다. 체코에서 오고, 인도에서 오고, 파리에서 오고.. 세계 각지에서 온 선물들을 양손에 가득 들고 웃는다. 가는 곳마다 사고 싶었다는 그의 말에, 어떻게 안 웃을 수가 있나. 선물이 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예쁘고 못생기고, 필요하고 안 필요하고, 쓸데있고 쓸데없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좋은 데 가서 놀더니, 연락 한 통 없이 나를 완전히 까먹은 줄 알았는데. 겨우 한국 돌아와서야 생각난 줄 알았는데. 가는 곳마다 사고 싶었단다. 이렇게 세계 이곳저곳에서 마음을 담아왔다.


 겨우 세 번 만난 사이니까, 가능한 설렘이다. "저 잘 모르시잖아요" 말할 수 있는 사이니까, 가능한 설렘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 설렘도 다 한철뿐이라는 것을 안다. 다 알아도, 따라가고 싶고 알아가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는 이 에피소드에 반해 버렸다. 저런 한철의 마음을 믿어서 좋을 게 없어요, 누군가 말해 온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저거 다 수작이에요, 누군가 말해 온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이미 반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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