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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chpress Feb 18. 2023

빵의 맛

“엄마, 이거 봤어?” 딸이 내민 스마트폰에는 얼마 전 대형 제빵회사 공장에서 어린 노동자가 안타깝게 숨진 사고 기사가 떠있다. Sns 에는 연일 노동자의 피 묻은 빵을 불매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한다. 딸에게 이런 곳이 네가 살아갈 세상이라 말하자니 목이 잠긴다. 동시에 딸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던 빵에 관한 씁쓸한 과거가 떠올라 입이 떫어진다.


1998년 IMF의 직격탄을 맞아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소개받은 자리는 백화점 판매직이었는데 이 일은 시작 전부터 노동자의 인격 제거가 시작된다. 인격 제거 테스트는 근무일 하루 전 일명 CS 매뉴얼을 달달 외운 후 담당자 앞에서 묻는 말에 외운 대로 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예를 들면 이런 항목이었다. 

*고객이 부당한 환불을 요구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_ 부정적인 표현은 절대 하지 말고, 미소를 지으며 환불 데스크로 안내한다.

*구매과정에서 언쟁이 생겼을 때 고객이 욕을 하거나 몸을 밀치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_ 고개 숙여 사과하고 사무실 담당 직원에게 안내한다.

판매 노동자의 사고나 판단을 요구하는 테스트가 아니라, 무조건 고객 우선, 고객 위주의 대처를 답해야만 통과하여 판매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시험이었다. 욕하면 듣고 때리면 맞으라는 매뉴얼을 외우고 있으면 벌써 가슴이 답답하지만 돈, 오로지 돈만 생각하고 그냥 버티자는 심정으로 가뿐히 거짓 굴욕 테스트에 통과한다. 


굴욕적인 어제의 시험을 잊고 상쾌하게 출근해 조끼와 위생모를 쓰고 매대 앞에 선다. 나는 오늘 소보로빵 3개 천 원 행사에 투입된 제과점 단기 판매 알바다. 가로 1.5M세로 1M짜리 백화점 매대 위에 소보로 빵이  쏟아지고 또 쏟아져서 산처럼 쌓인다. 동그란 조명이 소보로빵 산 위에 걸쳐져 정말로 산 위에 해가 뜬 것 같다. 백화점 오픈 음악과 동시에 전단지를 손에 들고 내 일터에 고객님들이 대거 출현했다. 살림 경제가 어려웠던 98년 당시에 소보로빵 세 개 천 원의 위력은 대단했다. 

입안에 단내가 나도록  하루에 몇천 개의 빵을 팔아댔다. 네다섯 건의 매매가 동시에 일어난다. 손으로 저 고객님의 빵 포장, 입으로는 다른 고객님의 가격을 말하고, 머리로는 다른 고객님의 금액을 계산하며, 눈으로 다음 고객님의 주문을 받는 식이었다. 단기 아르바이트생에게 점심 먹었냐고 물어주는 이도 없고, 당연히 휴식 시간도 없었다. 그냥 열심히 하면 되는 건 줄만 알았고 그러면 오늘 하루가 지나 있겠지 하는 심정으로 소보로빵을 팔아치웠다. 소보로는 계속 눈앞에 산처럼 쌓여 올라갔다가 팔려 내려갔다가를 반복했다. 

그날 매출이 몇백만 원이었다고 했으니까 소보로를 4천 개쯤 팔았을 때 일까. 오후 네 시쯤 여전히 매대 위로 소보로 빵들이 쏟아져 쌓이고 십여 명의 고객을 한꺼번에 상대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내 머리가 왼쪽으로 이동했다. 눈도 제대로 떠지지 않을 만큼 이미 피곤에 절어 있을 시간이라 별 느낌이 없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 ‘고객님’이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 미친년아 내 말이 안 들려? 귓구멍이 쳐 막혔어? 사람을 뭘로 보고 개무시야?’ 뭐 이런 말들이었는데 나한테 하는 소린지도 모르고 멀뚱멀뚱 머리채를 잡힌 채로 1-2분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슬로우 모션으로 매대에 산처럼 쌓였던 소보로 빵가루가 백화점 조명 아래 가루로 뿌려지고 내가 죽어서 나를 보는 것처럼 머리채를 잡힌 내 뒷모습이 보일 때쯤 정신이 들었다. 머리털이 한 움큼 뽑혀나가고 왼쪽 두피가 뜯겨 나간 듯이 얼얼했다. 그 순간 나에게 있던 존엄이며 존중 존재며 존 자가 들어가는 모든 것은 다 사라지고 부서져 먼지가 돼서 풀풀 날렸다. 

옆 매대 직원분들이 나를 말리고 식품코너 담당 직원이 달려와 고객님께 정중히 사과를 하고, 고객님을 다른 곳으로 모시고 갔다. 나는 삐뚤어진 위생모를 고쳐 쓰고 다시 세 개 천 원을 외치며 소보로빵을 팔았다. 근무시간이 끝난 후에 다른 판매 직원분들께 들은 바는 이렇다. 시끄러운 백화점 지하 식품매장에서 한꺼번에 10여 명을 상대하며 빵을 팔고 있던 나에게 그 ‘고객님’이 지금 몇 시냐고 시간을 물어봤다는 거다. ‘고객님’의 질문을 듣지 못하고 다른 고객에게 빵을 판매하던 나에게 그 ‘고객님’은 자기 말을 무시했다며 화를 내고 쌍욕과 함께 머리채를 잡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누가 봐도 명백히 그 ‘고객님’이 미친 것이고 너의 잘못이 아니니 상처받지 말라 다독여주었다. 이 일을 하려면 자존심을 토끼 간처럼 집에 놓고 와야 된다고도 했다. 

빵집 점장님의 ‘괜찮지? 내일도 출근할 수 있지?’ 하는 말에 뭘 밝히고 따지기도 전에 극복을 강요당했다. 고생했다고 받은 소보로 빵 50개가 들어있는 큰 비닐봉지를 안고 버스에서 내려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며 집까지 걸었다. 아까 뜯겨나간 내 머리털과 함께 바닥에 굴렀을지도 모르는 소보로빵들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 후로도 성실하고 잘 참는 아이라고 소문이 났는지 이 백화점 저 백화점으로 불려 다니며 아이스크림 초콜릿 도넛을 팔았다. 머리채는 안 잡혔지만 ‘고객님’ 들은 한결같았다. 반말로 던지는 돈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으며 미소를 지으며 존재를 죽였다. ‘내일은 자존심 따위, 간 쓸개 따위는 꼭꼭 집에 놓고 와야지’ 했는데 잘 안 되는 상태로 일 년을 버텼다. 백화점 판매과정에서 이런 정도의 부당함을 항의해 봐야 해결책은커녕 듣지조차 않는다는 것을 몸으로 알고 있었기에 누구에게 무엇도 고발하지 않고 억울함을 고이 다물고 지냈다. 침묵에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수치심만큼 돈을 받았다. 존중의 반대말이 ‘모멸’, ‘치욕’, ‘굴욕’ 이런 것이라면 나는 내가 받은 수치심만큼을 돈으로 환산해서 지급받은 것으로 생각했다. 이후로 백화점이라는 공간을 혐오하게 되었고 지금도 그때의 고통이 각인된 듯 백화점에 입장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진다. 


돈을 주고 물건을 받는 교환 행위 중에 사람들은 왜 판매 노동자들에게 스트레스를 풀까. 판매 노동자를 존중할 필요를 못 느끼고 가장 만만한 하위 부류로 분류하고 무시하는 이유가 무엇일지. 화풀이의 대상이 하필이면 나였을까. 나이가 어리고 가난한 집 딸이 여기와 천 원에 세 개짜리 빵이나 팔고 있으면 맥락 없이 욕을 하고 폭력을 써도 된다고 판단했다면 그 근거를 추적해 그 이유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나는 그저 ‘안전한 보복 대상이 되기 싫었다. 사회적으로 만만한 나를 짓밟아서 자신의 훼손된 감정과 자신감을 회복하려는 망상 때문에 눈앞에 있는 누군가의 존엄을 해치는 것이 과연 옳고 자연스러운 것인지 고민했다. 또다시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떤 표정과 태도를 지어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거짓 미소를 지으며 꾸역꾸역 돈을 벌었다. 아이스크림을 푸면서, 시식용 도넛을 자르면서 일 년간 계속된 아르바이트의 기간을 이런 고민으로 버텨냈다. 머리채를 잡히지 않으려면 일단 머리를 짧게 자를 것. 평소에 인상을 쓸 것. 함부로 친절하지 않을 것. 나를 고용한 백화점 측은 수치심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지 않으니 스스로 지킬 것. 돈을 내는 ‘고객님’께는 사과하고, 돈을 먹는 판매 노동자는 함부로 대하는 고용주들에게 억울함만 쌓여가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처참한 아르바이트의 시간은 끝이났다. 잔인한 어른들의 세계를 절절하게 공부했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가 돈을 벌려면 이런 일 당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저항을 포기해 버리는 무시무시한 경험이었다. 


 이제 곧 사회로 나가 경제 활동을 시작할 딸에게 이 이야기를 어떤 태도로 말해 줄지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당혹스럽고 부끄러운 느낌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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