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볼을 후려치는 바람에 입술을 오그라뜨려 훕- 하고는 어깨 속으로 목을 접어 넣는다. 간신히 버티고 서있다. 멀리서 보면 몸이 이쪽저쪽으로 흔들리는 것이 느림 템포의 라운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으로 보일 것 같다. 내 얼굴에 이런 것이 달려 있었던가. 평소 존재감 없던 짧은 귀밑머리가 죄다 일어나 세차게 펄럭인다. 보통 센 바람이 아니다. 바람에 이겨 보겠다며 낑낑대며 걸음을 떼 본다. 도저히 안 되겠어 멈추어 선다. 여기 거센 바람에 마주쳐 희한한 움직임을 하고 있는 것은 나뿐이 아니다. 저 멀리 끓는점을 넘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거대한 허연 거품이 검푸른 벽이 되어 솟구쳐 오른다. 츠와아아아아드드. 검은 벽은 어느새 내 발 앞까지 와 여린 레이스 같은 거품으로 사라진다. 바람에 맞서 나처럼 이상한 움직임을 하고 있는 것은 바다다.
“음 생각보다 검사 결과가 좋지 않네요. 그동안 많이 힘드셨을 텐데 왜 이제 병원에 오셨어요. 하지만 약물치료 효과를 기대할만합니다. 약 잘 챙겨 드셔야 해요. 치료가 성공해도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어요. 호르몬 때문인지 비타민 D 수치도 위험 수준으로 낮네요. 약도 드시고 강제적으로 하루 삼십 분이상 햇볕을 쬐셔야 합니다. “나쁜 숫자들로 가득한 혈액 검사 결과표를 받아 든다.
잠시 집 앞 편의점만 다녀와도 어지럽고 피곤해 바닥에 쓰러지면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지구 내핵에 도달하는 느낌. 이대로 잠들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업무 미팅 때문에 발을 끌며 나간 인사동 한복판에 주저앉고 말았고 겨우 정신을 차려 택시를 잡아타고 이곳 병원으로 왔다. 육신에 문제가 생긴지도 모르고 과민한 성격을 탓하고 우울감 때문이라 자신을 공격했던 내가 또다시 미워진다. 짜증이 난다. 얼른 조그만 알약을 삼킨다.
병명을 입력하고 엔터키를 누른다. 혈액 내 자기 조직을 적으로 판단해 면역반응을 일으키며 결과적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그런 병. 혈관 속에서 내가 나를 공격하고 있었다니 그간의 불안정한 심리상태와 이상 행동이 설명되는 듯해 희박한 웃음이 돈다. 혈관 내에서 벌어진 ‘나’들의 전쟁이 매 순간 자책하고 화를 주체하지 못해 자존감을 바닥을 치게 한 현상의 주범이었다. 병든 피가 설계한 것을 뇌가 거르지 못하고 나태하게 따르는 것을 반복해 온 것이다. 피들의 싸움이 가져온 결과는 참담하다. 비정상적으로 체중이 줄어 있고, 바닥을 기는 체력과 극심한 기분 변화로 인해 사람을 만나는 약속은커녕 간단한 외출조차 꺼리게 되어 악순환의 고립에 갇힌 상태였다. 병명을 들으니 그동안 영문도 모르고 괴로이 벌을 받는 줄로만 알았던 억울함이 풀린다.
아까보다 바람이 더 거세어져 몸을 가누기 힘들다. 몸뚱이는 이미 바람에 다 쓸려간 듯하고 비틀대는 기분만 여기 남아있다. 파도는 여전히 미친 듯이 거세게 밀려온다. 바다 한가운데가 솟구쳐 올라 퍼스슥 부서진다. 엄청난 바람의 힘에 저항하며 바다는 거대한 움직임과 비명을 만들어낸다. 저 한가운데서 나도 다 부서지고 비명을 지르며 사라지는 것을 상상해 본다. 잠깐의 순간. 시원하게 고통이 사라질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수면 위 파도만이 저항의 다가 아닐 것이다. 깊은 심연의 검은 덩어리들도 이제 곧 바람에 몸부림치며 거센 파도로 나에게 들이닥칠 것이 분명하다. 섬뜩해진다. 춥다.
“너를 친구로 너무 사랑하지만 나는 나를 더 사랑해. 이 전화 끊으면 이제 더는 나한테 연락하지 마” 20년 넘게 친자매처럼 지내온 이에게 단호하게 이별을 말했다. 편하다는 이유로 무례하게 내 삶을 침범당해 일상의 고요가 파괴된 지 오래였다. 그 친구는 어릴 적부 터 친하다는 이유로 아무 때고 찾아오거나 전화해 공감되지도 않는 기분과 짜증을 종일 배설해 댔다. 이런 일들에 에너지 출혈이 심했고, 이렇게 마구 다루어지다가 나 자신이 사라질듯한 위기를 느꼈다. 상대의 기분을 맞추려다 나와의 연결고리를 놓쳐 항상 기분의 주인이 내가 아닌 친구의 것이 되어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었다. 친구는 당황하며 사과했지만 이런 경고와 사과가 반복되는 것에 염증이 났다.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절교라는 것을 감행했다. 한동안 부재중 전화가 울렸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나 말고 다른 배설 대상을 찾은 듯했다. 상대는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낸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정작 내가 아팠다. 친구를 끊어 낸 것에 내가 나를 해하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스스로를 공격한 셈이다. 화가 난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기괴한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상태가 지속되었다. 자책의 칼과 원망의 얼음에 번갈아 베이는 시린 아픔이었다. 고통 속에서도 나는 내 탓을 하며 피가 설계한 자가공격을 해대고 있었다. 핏속에서 내가 져 점점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돌아서 나오려는데 점점 바람이 잦아들더니 해가 비친다. 바닷가 날씨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나와 달리 바다는 뭔가 알겠다는 듯 금세 잔잔한 파도를 밀어 보낸다. 방금까지의 거센 파도에 속은 기분이 들 정도다. 바람을 버텨내느라 비틀대던 몸을 털썩 주저앉힌다. 어떻게 저렇게 금방 바람에 적응해 움직임과 소리를 바꾸는 걸까. 갑작스러운 변화에 아무런 적응단계를 거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바다가, 파도가 한없이 부럽다.
변화와 침범을 웃어넘기지 못한 탓에 관계에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내가 한참 하수로 느껴진다. 내 쪽이 까칠하고 지나치게 예민한 것인지 그들이 무례하고 뻔뻔한 것인지 여전히 판단할 수 없다. 알 수 있는 것은 무엇들이 심연에 가라앉아있다는 것이다. 바람이 일어나면 그것들이 수면 위로 올라와 아무 데서나 툭툭 눈물로 터지거나 전혀 엉뚱한 대상을 향해 화로 폭발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조만간 모든 인간관계 앞에 선 내 앞가슴에 ’주의: 물 수 있음’ 같은 명찰이 달릴 것이다. 아무 때고 튀어나오는 이런 증상을 감소시키기 위해 상담을 하고 심리 서적을 읽고 명상을 하고 글쓰기를 한다. 답은 없다.
저기서 밀려오는 파도가 한 장 한 장 순서대로의 정답지이면 좋겠다. 갑작스러운 변화나 침해에도 유연하게 금세 적응해 변화로운 파도를 만들어내는 바다가 신기하고 부럽다. 따스해진 모래밭에 벌렁 누워버린다. 큰 대자로 팔을 벌려 모래를 움켜쥐어 본다. 왜 쓸데없이 민감하고 고통에 취약할까. 마음은 훈련. 훈련. 마음 훈련. 중얼거리며 꼼지락대니 손에 뭔가 잡힌다. 딱딱한 작은 것. 조개껍데기다. 손에 잡힌 것은 깨진 한쪽. 여린 속은 이미 오래전에 바다에 먹혔을 것이고 조개의 뼛조각이 해변에 밀려온 것이다. 이리저리 쓸리어 깨진 채 여기까지 왔구나. 껍데기 친구 손에 꼭 쥐고 일어나 척척 해변을 걸어 나간다. 뜨신 국물 한 그릇 마시고 집으로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