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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시간 Jul 24. 2022

<플라톤의 향연>

사랑에 대하여

 『향연』은 서로 다른 관점과 지향 그리고 능력을 가진 아테네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모여 그들 모두를 관통하는 관심인 사랑에 관한 생각을 나누는 이야기다. 기원전 404년 경, 아테네 비극 경연에서 우승한 아가톤의 집에서 소크라테스, 파이드로스, 파우사니아스, 아리스토파네스, 에뤽시마코스, 아리스토파네스, 아가톤, 알키비아데스가 각자의 생각을 펼쳐나가는 이야기로 아폴로도로스가 향연에 참석한 아리스토데모스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향연에 초대받지 않은 아리스토데모스는 망설임 끝에 소크라테스의 권유로 참석하게 되지만, 아가톤의 환영을 받게 되면서 비로소 이야기 전달자가 된다. 에뤽시마코스는 이야기 방식과 주제(에로스에 대한 찬양)를 제안하고 실질적인 진행자 역할을 맡는다. 이야기는 파이드로스에서 시작해서 앉은 순서대로 진행된다. 파이드로스는 에로스가 가장 오래된 신이며 최대선의 원인이라고 찬사 하며, 시인을 인용하고 사례를 드는 것으로 자신의 논점을 펼쳐나간다. 파이드로스는 에로스가 아름답게 살려는 사람들을 전 생애에 걸쳐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알케스티스, 오르페우스, 그리고 아킬레우스 이야기의 사례를 들며, 덕(탁월함, 용기)을 향한 열망에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다음은 파우사니아스로 이어진다. 파우사니아스는 에로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에로스는 하나가 아니라 천상과 범속의 에로스로 나눌 수 있어서 먼저 어떤 에로스를 찬양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행위 자체는 그 자체만으로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고 다만 행위 속에서 그것이 어떻게 행해지느냐에 따라 성격이 정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로스 일반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사랑하도록 유도하는 에로스만이 아름답다. 그런 논의를 바탕으로 범속의 에로스가 아닌 천상의 에로스를 찬양해야 하는데 범속의 에로스는 대상을 가리지 않는 것, 예를 들어 영혼보다는 몸을 사랑하는 것을, 천상의 에로스는 당시에 유행하던 소년에 대한 사랑을 예로 든다. 천상의 에로스를 수행하기 위해 소년 사랑에 관한 법과 지혜 사랑 및 다른 덕에 관한 법이 같은 곳에서 함께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다음은 아리스토파네스지만 그의 딸꾹질로 인해 에뤽시마코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에뤽 시 마코스의 에로스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에로스는 사람들의 영혼과 아름다운 자들에 대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 속에 있다는 것을 의술로부터 깨달았다. 몸들의 본성에는 이중의 에로스가 있다. 의술은 채움이나 비움과 관련하여 에로스가 몸 안에서 하는 일들에 대한 앎이며, 이런 일들에서 아름다운 사랑과 추한 사랑을 분간하는 자가 있다면 가장 의사다운 자이며 그는 환자의 몸이 변화를 일으켜 주는 자다. 질서 있는 자들에게 있는 천상의 에로스는 살갑게 대하여 그들의 에로스를 지켜주어야 하는 반면 범속의 에로스는 그것의 쾌락은 누리게 하되 어떤 방종도 만들어 넣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에로스의 능력을 자연과 신의 영역까지 확장시켜 에로스는 우리에게 일체의 행복을 마련해주고 신들과 친구가 될 능력을 갖게 해 준다고 말한다. 다음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로 이어진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앞선 사람들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시작하겠다고 말하며 자신의 연설을 시작한다. 인간의 성은 셋이었고 인간의 형태는 등과 옆구리가 둥글어 전체가 구형이었다. 인간의 성이 셋이고 그러한 성격을 갖고 있었던 이유는 애초에 남성은 해의 자손이었고, 여성은 땅의 자손이었으며 둘 다를 나눠 갖는 것은 달의 자손이었다. 그런데 그것들은 힘과 활력이 넘쳐나서 자신들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신들을 공격하고 하늘로 올라가려 시도했다. 제우스는 그들이 제멋대로 구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어서 둘로 자르기로 한다. 하나의 본성이 둘로 잘렸기 때문에 자신의 반쪽을 그리워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해서 그들의 치부를 앞쪽으로 옮겨 놓았다. 그래서 서로의 반쪽을 찾아다니는 숙명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인간은 남녀가 하나인 자들이었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욕망과 그 욕망에 대한 추구에 붙여진 이름이 에로스고, 신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다른 어떤 불행이 일어날지 모르며 신을 경건하게 따르는 모습을 보여줄 때 우리의 본성을 돌려받고 행복한 자로 만들어 주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소크라테스와 아가톤의 연설만 남은 상황에서 잠시 논쟁을 벌이지만 아가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아가톤은 신에 대한 무조건 적인 찬미보다 신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한다. 아가톤은 파이드로스에 반신반의하며 첫째 에로스가 신들 가운데 가장 젊고 섬섬하며, 형태가 유연하다고 말한다. 두 번째는 어떤 일을 행할 때 완력으로 행하지 않는, 정의에 대해 풍부한 절제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세 번째는 에로스의 지혜에 대해 말하는데, 에로스가 생겨나기 전에는 아낭케(필연)가 왕 노릇을 했기 때문에 신들에게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으나 에로스가 태어나고부터는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함으로 인해서 모든 좋은 것들이 신들과 인간들에게 생겨났다. 아가톤의 이야기는 에로스에 대한 찬송으로 마무리된다. 향연의 마지막 연설자인 소크라테스는 에로스의 기능보다 에로스의 관계나 지향적 본성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아가톤의 이야기에 따르면 에로스는 무언가에 대한 에로스를 말하는데 그렇다면 그 무엇은 에로스가 욕망하는 것을 말한다. 욕망하는 것은 자기가 결여하고 있는 것을 욕망하며, 이미 곁에 있는 것들을 욕망한다고 하는 것은 지금 곁에 있는 것들이 나중에도 곁에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것이다. 에로스가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자라면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고, 에로스가 아름다운 것들을 결여하고 있는데 좋은 것들이 아름답다면 그는 좋은 것들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 크라테스의 에로스에 대한 본성에 대한 이야기에 아가톤은 반론을 하지 못한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실존인물인지도 불분명한 디오티마의 이야기를 전한다.


 디오티마의 이야기


 신은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을 소유하고 있고, 아름답고 좋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자는 행복하다. 하지만 에로스는 좋고 아름다운 것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이것들을 욕망한다. 그렇다면 좋고 아름다운 것을 갖지 않은 에로스는 신이라고 할 수 없다. 에로스는 풍요의 신인 포로스와 궁핍의 신인 페니아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의 본성이 내재되어있어 그들 양자의 본성 사이에 존재하는 운명이다.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인데 지혜는 아름다운 것들에 속하기 때문에 에로스는 지혜를 사랑하고, 지혜를 사랑하기에 지혜와 무지 사이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간에 대한 에로스는 어떠한 쓸모가 있을까.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이 자기 것이 되기를 사랑하는 것이며 그것이 자기 것이 될 때 행복하게 된다. 여기서 사랑은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 아닌, 어떤 한 형태를 향해 매진하는 자들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좋은 것을 사랑하며 좋은 것이 늘 자신에게 있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좋은 것이 늘 자신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은 불사를 욕망하게 되고, 불사를 위해 아름다운 것 속에서의 출산으로 이어진다. 그다음으로 태어난 것을 길러야 하는데 인간은 양육을 위해 어떠한 힘든 일도 헤쳐 나간다. 사람은 어린아이에서 노인이 될 때까지 사람이라고 불리기는 하나 몸과 영혼에 있어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늘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간다. 이렇듯 가사적인 것은 자체의 닮은 또 다른 새로운 것을 남겨놓는 방식으로 불사에 참여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계속 이어질 미래를 위해 불사의 명성을 쌓거나, 여인을 통해 임신하고 아이를 낳는다. 여기서 몸이 아닌 영혼의 임신도 존재하는데 이는 분별과 여타의 덕을 말한다. 여기서 분별은 국가와 가정의 경영에 관한 분별인데 여기에는 절제와 정의가 요구된다. 에로스의 최종 목표인 비의(秘儀)는 젊을 때 아름다운 몸들을 향해 가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다음에는 몸에 있는 아름다움보다 영혼들에 있는 아름다움을 더 귀중하게 여겨야 한다. 아름다운 영혼에 대한 추구는 행실과 법으로 이어지고 이끄는 자에 의해 아름다움에 대한 것에 대한 앎을 직관하게 된다. 이 앎은 앞선 노고의 최종 목표로 그것 자체로 늘 단일 현상으로 있는 것으로 다른 것들이 생성되거나 소멸할 때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다. 인간에게 있어 가치 있는 삶이란 바로 아름다운 그것 자체를 아는 삶이다.


 소크라테스의 이야기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의 말에 설득되었으며, 자신이 설득되었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에로스에 대한 존경을 설득하려 한다고 말한다. 이어서 술에 취한 알키비아데스가 들어온다.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질투에서 벗어나고자 향연 참석자들에게 화해의 도움을 청한다. 에뤽시마코스는 알키비아데스에게 향연의 진행사항을 알려주었으나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찬양과 자신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목적(牧笛)이나 피리를 들고 있는 실레노스에 비유하며 양쪽으로 열면 신들의 상(像)이 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자들에 대한 사랑에 끌리는 성향이 있고 늘 이런 자들 주변에 있으면서 매혹되지만 내면은 절제로 가득 차있다. 소크라테스와 소년 애인들과 나누는 내밀한 대화를 나누기를 기대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조금의 진전도 되지 않았으며 자신은 지혜 사랑에 속하는 이야기들에 가장 고통스러운 곳, 즉 심장 또는 영혼을 물리게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이 될 만한 분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소크라테스가 주저한다고 하자,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가 자신에게 없는 월등한 아름다움을 소크라테스에게서 보는 것이며 그렇다면 청동을 황금과 맞바꾸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이후 둘이 더불어 밤을 보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이어지는 소크라테스의 다양한 행적에서 나타난 절제와 용기에 탄복했다. 소크라테스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소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지성을 갖고 있으며 신적이고 덕의 상을 많이 가지고 있고 아름답고 훌륭한 자에게 어울리는 많은 것이 내재되어있다. 알키비아데스의 소크라테스에 대한 찬송에서 이어지는 불만은 자신이 그들을 사랑하는 자인 양 여기게끔 그들을 기만하지만 소크라테스 자신이 사랑하는 자가 아닌 사랑받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말이 아가톤과 사이를 갈라놓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결국 아가톤이 소크라테스 옆에 앉고 술자리는 무르익어갔다. 아가톤과 아리스토파네스 소크라테스만이 계속 술자리를 지켰고, 아리스토데모스의 대화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한 사람이 희극과 비극을 만들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였다. 이렇게 모두를 잠들게 한 후 소크라테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느 날과 같은 일상을 보냈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향연』은 사랑이라는 주제에서 시작해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가사자로서 그 한계를 넘어 불사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아름다운 것을 영혼 또는 육체를 통해 출산하고 양육한다는 디오티마의 이야기는 오토 랑크가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다고 말하는 자기 영속성에 대한 욕망과 최근 읽었던 심리 관련 서적에 실린 인간 궁극의 목적이 자기 복제와 양육이라는 최근의 연구결과와 연관이 있는 듯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삶과 접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향연』의 이야기 주제는 사랑이다. 나에게 사랑이란 어떤 의미일까. 이 책에서 말하듯, 사랑이란 나에게 결핍된 그 무엇을 채우려는 욕망이며, 결국 그 욕망은 나에게 좋음과 아름다움으로 여겨지는 것을 내 안에 늘 있게 하여 행복한 상태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일까. 행복한 상태를 정의함에 있어서 감각은 하등 한 것이며 앎으로 충만한 정신이 궁극이며 최선인 것일까. 감각과 이성은 분리 가능한 것일까. 죽음의 두려움에서 기인한 불사의 추구라는 가사자의 숙명을 넘어서기 위해 자신에게 좋아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을 통해 결핍을 채우는 방식으로 불사의 존재로 남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자 숙명인 것일까. 한 권의 책을 읽어나갈 때 이러저러한 말들에 공감하고, 의문을 가져보고, 내가 아는 사례에 적용해보기도 하지만 결국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결국 하나의 문장이 오랜 울림으로 남는다. 그 문장은 나의 일과 관련이 있기 때문인 듯하다. 디오티마와 대화를 마치며 ‘이제 내가 설득당한 것으로 타인을 설득하고자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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