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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시간 Apr 13. 2023

아주 작은 아이

시선의 차이

이곳을 찾아온 이가 단지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가져온 아주 작은 두 아이 중에 더 작은 아이를 이곳에 남겨두었다. 사실 내가 이곳에 남겨두기를 부탁했다. 조금 더 큰아이는 다른 으로 갔다. 우연히 방문한 두 아이 중에  이 작은 아이를 키워보고 싶었다. 그저 내 감각이 시킨 것이었다. 그렇게 어제 남겨진 이 아이를 오늘 아침 한참을 바라보았다. 왜 이 아이를 남겨두고 싶었을까. 감각이 시킨 일을 어제 나눈 이야기 안에서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보아야 할까. 내 무의식적 발화행위에 담긴 진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아야 하는 것일까. 불현듯 스치는 말에 담긴 나의 진심... 진심은 내 안에 발화되지 못한, 내 기억의 거미줄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나와 내 안의 타자가 나눈 대화의 소산물일까...


어제 만났던 이들에게 들은 이야기 가운데, 유난히 내 발화행위를 자극했던 이야기... 거친 말을 속사포같이 쏟아내던 한 노인 때문에 매우 불쾌했다는 이야기. 70세 이상은 상담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그 노인의 현재, 분노 가득한 모습보다 그러한 모습이 되어버린 그 노인의 수많은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 인간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로 세상에 던져진다. 엄마의 배 안이라는 작은 공간은 상대성과 차이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을까. 뱃속 아기는 가끔씩 들려오는 소리와 따뜻한 액체에 담겨 평온했던 나날들을 뒤로하고 어느 날 갑자기 밝은 불빛과 건조한 공간에 던져진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일단 태어나서 수 주 동안은 죽음이란 막연한 공포보다는 삶의 유지라는 단일한 목표를 향해 하나씩 일차적인 욕구충족기술을 배워나간다. 이후, 수년동안은 생존방식을 알려주는 사람을 선택할 수 없다. 그저 내 주변 가장 가까운, 나를 돌보아주는 이에게 배우는 수밖에... 나를 돌보아 주는 이와 관계를 대략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까. 첫째, 누군가는 운 좋게 삶에 적응하는 기술을 터득한 이를 만나, 그로부터 체화되듯 삶의 적응방식을 익혀나간다. 두 번째, 누군가는 자신의 삶의 방식이 최적이 아님을 인정하고 보다 넓은 세상이 존재함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이를 만난다. 그 또한 행운이다. 세 번째, 자신의 살아온 경험의 틀이 삶을 살아가는 기술의 총체라고 인식하는 이에게 양육된다면, 두 번 태어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두 번 태어나는 고통 없이, 누군가에 의해 체화된, 기존의 틀을 의심 없이 고수하며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세계를 살아간다면 감각의 불협화음이 점차 증가해서 분노가 되고 그 분노가 쌓여 그 노인과 같이 분화구와도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첫 번째 경우는 어떠할까. 주체적인 삶을 위해 다시 태어나는 고통을 감수하는 데는 후자와 큰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지만, 성공적인 경험에 의해 두 번째 삶을 형성해 나가는 것에 대한 고통스러움의 강도가 조금은 적지 않을까... 두 번째 경우도 방식은 다르지만 고통의 강도에 있어서는 첫 번째와 비슷하지 않을까...


이곳에 남은 작은 화분에 담긴 작은 생명체를 한 참을 들여다보니 새끼손톱보다 더 작은 싹이 나를 보는 것 같다. 보잘것없이 작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아주 작은 ... 생각을 거듭하며 조금씩 저 작은 싹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다. 그저 스러지듯 사라져도 당연할 것 같은 싹에 조그만 의미를 부여한다. 내일은 알 수 없다. 모든 것은 가능태일 뿐... 어차피 내일을 알 수 없다면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가능태로서 가치는 같지 않을까. 모든 살아있는 것에는 희망이 있지 않을까... 공기와  물과 따뜻한 시선이 있다면... 아주 작은 싹도 뿌리를 내릴 수 있지 않을까... 그 노인에게도 아주 작은 싹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변화 가능성이 없다는 단정은 숨이 막히는 듯하다. 지금의 '나' 또한 저 작은 새싹과도 같은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한다면... 저 작은 싹을 틔우기 위해서 주기적으로 적당한 물을 주고 햇빛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과 같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걱정에서 발생하는 불안은 반복적인 행위에게 맡기고 지금을 살아가는 것, 그것 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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