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을 오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이지(理智)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발목이 잡힌다. 자신의 의지만 주장하면 옹색해진다.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겨 가고 싶어 진다. 어디로 옮겨가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이 생겨난다. ……. 옮겨 살 수도 없는 세상이 살기 힘들다면, 살기 힘든 곳을 어느 정도 편하게 만들어 짧은 순간이라도 짧은 목숨이 살기 좋게 해야 한다. 이에 시인이라는 천직이 생기고, 화가라는 사명이 주어지는 것이다. 예술을 하는 모든 이는 인간 세상을 느긋하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까닭에 소중하다."
- 나쓰메 소세키 / 풀베개 -
일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 묵직한 어떤 것이 무게중심이 되어 같은자리를 맴돌게 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 같은, 첫 단추의 시작점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는 반복적인 생각. 이러한 순환적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그림에 투사된 나를 통해 거리를 두고 하나의 대상으로 나를 바라보고, 그러한 작업을 반복함으로써 나를 움직이는 작동원리를 발견하고, 그 원리에 의해 형성된 틀을 변형시켜 어제와 다른 오늘과 내일을 만들어 나가야겠다는 자기 실험적 사고가 발상이 되어 그림일기를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 첫 문장을 읽으며 살며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미술과 치유, 그리고 심리에 대한 직업적인 의무감에서 벗어나 그저 물 흐르듯, 자동기술적인 방식으로 시각적인 일상과 경험적 사고를 그림과 글로 엮어보는 것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감각과 감정 그리고 사고와 욕망이 조화롭지 않아서인지 사고와 감정의 불협화음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고이 간직한 어떤 것을 자극해서 불안이 발생했고, 그 불안이 불면을, 나아가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낳고 있기에 그저 실의 끝을 천천히 풀어내듯 사고와 감정을 그림과 글로 표현하는 작업을 해보려고 한다. 비록 그러한 작업이 어느 길로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편안하고 유쾌한 작업이라는 결론으로 생각그림을 시작한다. 내일은 좀 더 내 안의 타자와 평화로운 공존이 되길 바라며 책과 영화 그리고 일상의 소소한 사건을 이미지로 표현하고 글을 기술하는 방식으로 나와의 관계를 재정립해보자.
오늘 그림.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사실 최근 2~3년 동안 내 마음에는 항상 비가 오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조금씩 쌓여가는 습한 기운은 내 마음 구석 어딘가에 매일 부슬거리는 비가 내리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주어진 일을 한다.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을 것만 같은, 마음 한 구석이 텅 비어있는 듯한 느낌. 사고와 분리된 감정이 내 마음 곳곳을 부유하다 이제는 지쳐, 단체로 시위라도 벌이는 것일까. 가끔 길을 걷다 문득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가버린 것 같이 느껴진다. 오늘의 첫 번째 그림.
만발했던 벚꽃이 거센 비바람에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도처에 새로운 꽃이 피어있다. 꽃이름은 너무 어렵다. 암기는 가볍게 포기. 이름을 알 수 없는 꽃과 햇빛을 본 기간에 따라, 색이 달라진 나뭇잎의 초록빛 향연이 표현의 욕구를 상승시킨다. 팔레트에 있는 초록빛을 순서대로 찍어 도화지에 다른 모양으로 찍듯이 표현한다. 둥근 붓, 사선붓, 납작붓을 이용해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가며 그린다. 실제로 같은 색, 같은 모양, 같은 크기의 나뭇잎은 없으므로…. 떨어진 꽃잎, 가지에 붙어있는 이러저러한 꽃도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꽃이름을 알 수 없기에 그저 꽃 같으면 된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붓 끝을 이용해 내 상상 속의 꽃을 색으로 형태로 펼쳐나간다.
도서관 가는 길은 초록의 향연이 펼쳐진다. 다양한 초록을 붓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표현한다. 내 눈에 보인 수많은 초록을 어떻게 작은 종이에 옮길 수 있을까. 도서관 가는 길에 만났던 고양이와 조용한 응시를 통한 말없는 대치에서 느껴진 친근함, 며칠 뒤 다시 마주한 전체적으로 까맣고 눈주위만 하얗던 고양이는 나를 알아보았을까. 초록의 향연에 돌을 이리저리 배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1월 어느 날 부산의 한 해변가에서 보았던 여기저기 세워놓은 돌탑을 흩어놓은 것일까. 돌 하나하나에 담긴 소망을 내가 가는 길 위에 옮겨놓은 것일까. 내가 바라는 것들이 나를 외면할 때 막연히 노력이 부족해서, 정성이 부족해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삶의 편의를 위해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맞을까. 그저 흘러가는 시간에 맡기고 오늘 떠오른 것들을 하는 것이 맞을까. 이리저리 다른 시도를 하는 것이 맞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소망이 담긴 저 돌들 하나하나에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
도서관 가는 길에 만났던 초록의 향연과 소망이 담긴 작은 돌 위에 비가 내린다. 오늘과 내일이라고 믿고 싶은 초록의 향연은 마음의 창을 사이에 두고 현실이 아닌 환상으로 바뀌고 창을 타고 비가 흐른다. 선명했던 것들이 비에 가려 형체를 잃어버린다.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믿고 싶었던 유아적이 망상이 비로 인해 본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해진다. 기대는 항상 실망으로 돌아왔다. 그저 모든 것이 스쳐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마음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흔적마저도 상대적인 비교 선상에 놓으므로 그 어떤 감정도 흔적을 남기지 않겠다는 생각. 모든 것이 과정일 뿐임을 상기하며 어떤 감정도 스치듯 지나가게 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어떤 감정도 지나가면 하나의 흔적이 되어 다른 사건에서 발생하는 감정에 영향을 주기에 어떤 감정도 다른 감정에 영향을 주는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기 교습이 필요하다.
오늘의 마지막 그림
수제책을 만들고 남은 종이에 평평한 붓으로 이리저리 선 연습을 해본다. 이런저런 색을 바꿔가며 선을 긋고 나선형을 그려본다. 선은 나무줄기가 되고 나선형은 나이테인 듯하다. 마침 어울리는 종이조각이 눈에 들어오기에 나무줄기를 그린다. 그 위에 태점을 찍는다. 지인의 작업실에 놓인 그림이 떠올라서 그리게 된 나무였다. 그 그림은 제법 큰 캔버스에 비스듬히 거친 사선이 그려져 있었다. 왜 나는 선 하나로는 부족하게 느껴질까. 어차피 모사라면 나무 하나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그린 두 개의 선은 마주한 나무가 아닌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나무같이 느껴진다. 태점이 각자 생각하는 피라미드의 정점을 향해 오르는 사람 같아 보인다.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피라미드의 정점은 무엇일까. 피라미드의 정점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아닐까. 무리를 떠날 수 없기에, 다수의 진실이 향하는 시선을 무시할 자신이 없기에…. 결론은 그저 그런 오늘을 사는 것이다. 아침의 태양이 뜨는 것은 부정할 수 없기에, 태양이 떠오르면 시작을 하고 어둠이 찾아오면 하루를 돌아보고 내일을 준비한다. 그런 삶의 반복이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 주지 않을까. 그곳이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도 어쩔 수 없지 않을까.
단조로운 일상에 스치듯 마주했던 이미지를 떠올리기 위해눈을 감고, 심상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붓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그림으로 옮기고 나니 감정이 조금진정되고, 정리되는 것 같이 느껴진다. 한 주간에 감정의 격동이 물과 붓을 통해 종이 위에 낯선 흔적이 되어 각기 다른 감각의 옷을 입은 '나'로 탄생하는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