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풀베개>를 읽으며, 자연의 정취가 스민 문장에 감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 번에 읽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내가 이해력이 부족해서일까'라는 자문을 해보다, 서삼독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읽는다. 두 번째 읽음에서 투사가 일어난 것인지, 어렴풋이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마음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하지만 내가 읽은 관점은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생긴다. 그래서 책 모임을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결국 책 모임은 서로의 관점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편향됨을 확인하기 위해 하는 것일까. 나는 나에 대한 확신이 없으므로 타인의 관점과 사유를 얼마든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 지금 필요한 건 내 관점과 사유를 정리해 보고자 싶다는 것이다. 내 관점이나 사유를 바람에 가벼이 흩날리는 민들레 홀씨와도 같이 가벼이 여기며 살아왔기에 이제는 내 사유에 관심을 가져볼 시기인 듯하다. 내 사유가 향하는 곳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내 시선이 머무르고 마음이 움직였던 문장을 나열해 본다.
"산길을 오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이지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의 발목이 잡힌다. 자신의 의지만 주장하면 옹색해진다.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겨 가고 싶어 진다. 어디로 옮겨 가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
이 생겨난다. 옮겨 갈 수도 없는 세상이 살기 힘들다면, 살기 힘든 곳을 어느 정도 편하게 만들어 짧은 순간만이라도 짧은 목숨이 살기 좋게 해야 한다. 이에 시인이라는 천직이 생기고, 화가라는 사명이 주어지는 것이다. 예술을 하는 모든 이는 인간 세상을 느긋하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까닭에 소중하다.……살기 힘든 세상에서 살기 힘들게 하는 근심을 없애고, 살기 힘든 세계를 눈앞에 묘사하는 것이 시고 그림이다. 또는 음악이고 조각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묘사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직접 보기만 하면 거기에서 시도 생기고 노래도 솟아난다. 착상을 종이에 옮겨놓지 않아도 옥이나 금속이 스치는 소리는 가슴속에서 일어난다. 이젤을 향해 색을 칠하지 않아도 오색의 찬란함은 스스로 심안(心眼)에 비친다."
- 내가 생각하는 미술치료가 이런 것일까. 이 막연함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구체화시키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인 것일까. 수행성의 미학을 미술치료에 적용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 할 수 있을까. 미술을 매개로 한 만남의 시간에서 동시적 상관적으로 발생하는 전이와 교감을 통해 화학적인 변화를 향한 작은 변화의 가능성이 발생할 수 있도록 미술을 가슴에서 배양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미술치료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 할 수 있을까.
"셀리'의 시「종달새에게」가 떠올라 암송하고 있는 구절만 입속으로 외워보았으나 기억하고 있는 건 두세 구절에 지나지 않았다. 그 두세 구절에는 이런 게 있다.
앞을 보고 뒤를 보고
없는 것을 갖고 싶어 하네
진지한 웃음이라 해도
거기에 고통 있느니
가장 감미로운 노래에는 가장 슬픈 생각이 깃들어 있음을 알라.
시인에게 시름은 따르기 마련인 것인지도 모르지만, 저 종달새 소리를 듣는 마음에는 티끌만 한 고통도 없다. ……. 괴로움이 없는 것은 왜일까. 그저 이 경치를 한 폭의 그림으로 보고 한 편의 시로 읽기 때문이다. …….
자신이 그 일에 당면하면 이해의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아름다운 일에도, 훌륭한 일에도 눈이 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자신도 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알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있는 제삼자의 위치에 서야 한다. 제삼자의 위치에 서야 연극을 봐도 재미있다. 소설을 읽어도 재미있다. 자신의 이해는 문제 삼지 않는다. 보거나 읽는 동안만은 시인이다."
- 셀리의 시에는 인간의 실체 없는 결핍이라는 환상이 빚어낸 욕망과 사랑의 양 또는 크기와 정비례하는 양가감정이 깃들어있는 듯하다. 살기 힘든 세상, 심연에 부유하는 감정인지 기억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것들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나만의 음악으로 창조하듯이 주어진 삶을 평화롭게 유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 할 수 있을까. 더하여 제삼자의 위치에서 자신을 보는, 즉 작가가 말하는 의리나 인정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비인정(非人情)의 상태가 되도록 훈련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까.
"흐릿한 먹빛 세계를, 몇 개의 은색 화살이 비스듬히 달리는 가운데 흠뻑 젖은 채 마냥 걸어가는 나를, 나 아닌 사람의 모습이라 생각하면 시가 되기도 하고 하이쿠가 되기도 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완전히 잊고 순수 객관에 눈을 줄 때 비로소 나는 그림 속의 인물로서 자연의 경치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다만 내리는 비가 괴롭고 내딛는 발이 피곤하다고 마음을 쓰는 순간, 나는 이미 시 속의 사람도 아니고 그림 속의 사람도 아니다. 여전히 시정(市井) 풋내기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는 비인정, 즉 지(智), 정(情), 의(意)에서 벗어나 거리를 두고 자신을 바라보려 하나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나 또한 예술에 대한 미련에서 비롯된 욕망에 사로잡혀 비록 상상 속에서라도 모래성을 쌓았다 무너뜨리는 이상과 현실을 오가는 일상을 반복한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클수록 우울감도 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을 주이상스로 받아들이고 현실에서 어떻게 공존할 것인지 또는 타협할 것인지에 접근해 보아야 할까. 욕망에는 만족이 없으므로 증상이라 여기고 즐겨야 하는 것일까.
"지금 내가 그리려는 제재는 그다지 분명한 것이 아니다. 모든 감각을 다 고무하여 이를 마음 바깥에서 물색한들 모난 것과 둥근 것, 홍색과 녹색은 물론이고 짙고 옅은 음영, 굵고 가는 선을 찾아내기란 힘들다. 나의 느낌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다. 설사 외부에서 왔다고 해도 내 시야에 펼쳐진 일정한 풍물이 아니니, 이것이 원인이라고 손을 들어 사람들에게 분명히 보여줄 수는 없다. 있는 것은 오로지 마음뿐이다.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면 그림이 될까. 아니, 이 마음을 어떤 구체성을 빌려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가가 문제다. ……. 색깔, 형태, 스타일이 만들어져 자신의 마음이, 아아 여기에 있었구나, 하고 순식간에 자기를 인식할 수 있도록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생이별한 자기 자식을 찾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자나 깨나 잊지 못하던 어는 날 네거리에서 문득 해후하여 번갯불이 번쩍일 틈도 없이, 아 여기 있었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게 그려야 한다. 그게 어렵다. 그런 표현만 된다면 그림을 보고 누가 뭐라 하든 상관없다."
나는 한 밤중 잠에서 깨어 스치는 생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 핸드폰에 적는다. 하지만 그렇게 적은 문장을 다시 보지 않는다. 그 문장은 섬광이었을 뿐이기에 그때 그 시간이 지나면 의미 없이 느껴질 것이라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그저 흔적을 남기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일까. 다시 보지 않을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왜 나는 의미 없는 행위에 집착하는 것일까.
"흐르는 것일수록 살아가는 데 힘들지 않다. 흐르는 것 안에 영혼까지 흐르게 하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보다 고맙다. 역시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익사자는 풍류다."
흐르는 데로 살아가고, 뒤돌아 보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은 그런 삶을 지향하지만 아직은 나에게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기교가 이렇게 극단에 달했을 때, 기교가 보는 사람을 강제하면 추하다고 한다. 아름다운 것을 더욱더 아름답게 하려고 안달할 때, 아름다운 것은 오히려 그 정도가 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인간사에서 차면 기운다는 속담이 바로 이것을 말한다."
긴 시간과 끈기를 필요로 하는 기교의 극단을 바라는 마음과 핑계일지 모르지만 기교는 재현에 불과한 것이라 치부하며 교묘하게 우회하면서도 기교에 대한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다. 비약적으로 발달하는 기술이 손을 능가함을 알면서도 기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함은 손을 통해 느끼는 일종의 카타르시스에 대한 감촉에 대한 기억이 감각세포 어딘가에 존재하기 때문인 것일까 ….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서야 간신히 바로 이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흔히 있는 정신 중에 연민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연민은 신이 모르는 정이고, 게다가 신에게 가장 가까운 인간의 정이다. 나미 씨의 표정에는 이 연민의 정이 조금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 점이 좀 부족한 것이다.."
화공이 묵고 있는 온천장에서 만난 나미 씨가 자신을 그려달라고 하자 화공은 그릴 수 없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이러저러한 생각을 한다. 생각 끝에 화공은 나미 씨에게 결여된 것은 '연민'이라고 말한다. '연민'은 무엇일까. 변연계에 축적된 생존본능과 유사한 교감신경의 반응 즉, 의식화되지 않은 감각기억의 잔재는 아닐까. 인간에게 내재된 무의식적 습관 즉, 자신이 속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감각적으로 체화된 것이 행동이나 의식적인 사고로 표출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평소 공기와 물상(物象)과 채색의 관계가 우주에서 가장 흥미 있는 연구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색을 주로 하여 공기를 표현하는가, 물(䥼)을 주로 하여 공기를 그리는가. 또는 공기를 주로 하고 그 안에 색과 물을 짜 넣는가. 그림은 약간의 마음가짐 하나로 여러 가지 표현이 나온다. 이 표현은 화가 자신의 기호에 따라 달라진다. ……. 개인의 기호는 어떻게 할 수 없다. 하지만 일본의 산수를 그릴 생각이라면 우리 역시 일본 고유의 공기와 색을 내야 한다. 아무리 프랑스 그림이 훌륭하다고 그 색을 그대로 옮겨서는 일본의 경치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림에 대한 나의 기호와 마음가짐은 무엇일까. 나는 현대미술의 다양성에 매몰되어 가는 것일까. 내 안에서 울려 퍼지는 수많은 타자의 욕망에 갈 곳을 잃은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의 경치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의 고유성을 내포하는 경치의 기준을 시기 또는 양식으로 정하고, 마치 테세우스의 배처럼 북원하고 보수해 나간다면 우리의 경치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이번 여행을 감행한 것은 속된 정에서 벗어나 어디까지나 화공이 되기 위해서였기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 그림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나에게도 이런 여행이 필요한 걸까. 혹시나 존재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으로 나만의 고유한 어떤 것을 창조하기 원한다면 일정 기간 자폐공간에 갇히는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만약 인정이라는 좁은 입각점에 서서 예술의 정의를 내릴 수 있다면, 예술은 우리들 교육받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숨어들어 사악함을 피해 옳은 길로 나아가고 부정을 물리치고 정의의 편에 서며 약자를 돕고 강자에 맞서지 않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일념의 결정체로서 찬연히 빛을 반사하는 법이다."
나만의 고유한 어떤 것을 배태하기 위해서는 비인정의 상태가 필요한 것일까. 나포함 모든 것을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한 것일까.
"문명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개성을 발달시킨 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 개성을 짓밟으려고 한다. 한 사람 앞에 몇 평의 지면을 주고 그 지면 안에서는 눕든 일어서든 멋대로 하라는 것이 현재의 문명이다. ……. 문명은 개인에게 자율을 주어 호랑이처럼 사납게 한 뒤 다시 우리 안에 던져 넣고 천하의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동물원의 호랑이가 구경꾼을 노려보며 드러누워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평화다."
AI에 대한 기사들을 보며 편승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은 위기감을 느낀다. 컴퓨터 그래픽은 종이와 물감의 물성에 가까워지기 위해 하루가 다르게 진보한다. 모르는 척해야 할까, 동화되어야 할까, 내 것으로 만들어 활용해야 할까….
"나미 씨는 망연히 떠나는 기차를 바라본다. 그 망연함 속에는 신기하게도 지금껏 느껴본 적이 없는 '연민'이 가득 떠 있다." "그거예요! 그거! 그게 나오면 그림이 됩니다."
화공은 러일전쟁에 출정하는 나미 씨 사촌동생의 전송에 동행하는데 기차가 떠나는 순간 나미 씨의 표정에서 결여되었다고 느꼈던 연민을 발견한다. 여기서 연민은 '아와레'로 소세키가 말하는 예술의 한 경지와 같은 제3의 그림을 말한다. 앞서 화공은 제3의 그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보통의 그림은 느낌이 없어도 물체만 있으면 된다. 제2의 그림은 물체와 느낌이 양립하면 된다. 제3의 그림에 이르면 존재하는 것은 오직 마음뿐이기 때문에 그림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마음에 적합한 대상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 대상을 쉽게 나오지 않는다. 나온다고 해도 쉬이 완성되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 화공은 시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여행을 떠났지만 그림은 한 점도 그리지 못한 채 소설은 끝을 맺는다. 마치 앞에서 "착상을 종이에 옮겨놓지 않아도 옥이나 금속이 스치는 소리는 가슴속에서 일어난다. 이젤을 향해 색을 칠하지 않아도 오색의 찬란함은 스스로 심안에 비친다. 그저 자신이 사는 세상을 이렇게 깨달을 수 있고 혼탁한 속세를 품은 마음의 카메라에 맑고 밝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된다."라고 한 말을 답습하듯이 ….
소설 속에서 작가가 자연의 정취와 인정과 비인정사이를 오가며 이야기하는 이상적인 시와 그림에 대한 서정적인 묘사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시대적 배경이 현저한 차이가 있음에도 지금의 상황과 유사함도 있는 듯하다. 소설이 1905년에 발표되었으니 100년이 훨씬 넘었지만 문명의 발달에 대처하는 자세에 대해서는 지금과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진다. 다양한 듯하면서도 한 곳을 향하는 듯한 현대라는 시·공간에서 시와 그림은 어떤 방식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인지, 나아가 시시각각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문명의 회오리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이러저러한 생각에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