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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시간 Aug 06. 2023

<저지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기

『저지대』는 영국 런던, 벵골 출신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 로드아일랜드로 이민하여 성장한 줌파 라히리의 네 번째 책이다. 나는 인간의 역사라는 시간과 공간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개별적인 고유한 서사를 섬세하게 풀어나가는 작가의 사유에 매료되었다.



"내 고향에 묻히게 해 주오,

큰 물결 이는 따뜻한 바다 같은 풀숲 속에,

 - 조르조 바시니, 『로마에 경의를 표하다』"


나는 ‘고향’, ‘묻히게’, ‘큰 물결 이는 바다 같은 풀숲’ 같은 말들이 분명 낯설지 않은 단어의 조합임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로 형상화시키는 것이 어렵다. 고향이란, 육체적인 탄생이 아닌 두 번째 탄생과도 같은, 인식의 전환점의 계기가 되는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살아 있지 않다면 배울 것 도 없어. 죽음 앞에서 우린 평등해, 그 점에선 죽음이 삶보다 나은 것 같아"


살아 있는 동안은 매일이 새롭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다. 내일 또한 그럴 것이다. 귀로 눈으로 하는 경험을 통해 ‘왜 이제야 그것을 알았을까’, ‘예전에 알았더라면’, ‘이런 것도 있었군’, ‘이것이 이렇게 여기서 만나네’라는 말들과 함께 ‘나’는 어제와 다른 ‘나’가 된다. 이것을 살아있음으로 가능한 배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배움을 통해 나는 성장하는 것일까, 변화하는 것일까.


이야기는 수바시와 우다얀이라는 두 형제가 톨리 클럽이라는 소수에게만 출입이 허락된 공간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것으로 시작한다. 정체성에 대한 요구는 경계의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누군가는 넘을 수 없는 벽을 인식하며 벽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벽을 인식할 수 없도록 철저히 차단된 곳에서 태어난 사람에게는 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을 제외한다면, 벽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마주한 벽을 파괴하려 하거나, 벽을 무시하거나, 벽의 형성원리나 구조를 파악하려는 사람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까.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다얀은 마주한 벽의 구조를 파악해서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면을 해체시키려는 사람이고 수바시는 벽을 무시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는 방식으로 우회하는 사람인 것일까. 우다얀은 벽에 맞서 싸우다 아내인 가우리를 포함한 가족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잉태된 자신의 아이의 존재를 모른 채 죽어간다. 가족들에게 우다얀의 빈자리는 서서히 흘러 저지대에 고인 물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천천히 스며들어 진득한 늪이 되어 버린 것과 같이 의식과 별개인 기억으로 자리 잡는다.


우다얀이 가우리의 집을 갔을 때 둘이 나누었던 대화가 인상적이다.


"이 세상에 대해 데카르트는 뭐라고 말하지?

가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해주었다. 인식의 한계와 밀랍 실험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밀랍이 열에 녹아서 물리적인 면이 변해도 밀랍의 본질은 남아 있다고 했다. 이것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감각이 아니라 정신이라고 말했다.

생각하는 것이 보는 것보다 우월하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그래요.

마르크스는 읽어본 적 있어?

조금.

왜 철학을 전공해?

뭔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돼요.

그런데 그게 뭐가 중요해?

플라톤은 철학의 목적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라고 했어요."


내가 누군가에게 이야기했던, 어딘가 남긴 글을 읽는 듯하다. 나도 한때 시시각각 변하는 감각보다 정신이 항상성을 유지하는 본질이라고 믿던 때가 있었다. 비록 현재 내 사유도 언젠가 변할 수 있지만, 정신은 능동과 수동이 얽힌 인식의 거미줄이고 감각은 그 거미줄에 걸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정신과 감각은 내가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내가 인식 가능한 것들의 총체일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개별적이며 고유한 정신과 감각이 존재할 뿐이다. 개별적인 사유의 집합 안에서 어떻게 큰 충돌 없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까.


가우리는 우다얀이 주는 책을 통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정치적 자유의 한계에 대해 그리고 자유와 권력이 같은 것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가우리는 자신의 정신이 예리해지고 집중력이 높아졌다고 느꼈다. 세상의 존재를 의심하는 대신 세상의 구체적인 구조를 붙들고 씨름했다. …선의 오른쪽에는 가까운 과거가 있었다. 그녀가 우다얀을 만난 해가 있었고, 또한 우다얀을 모르고 살았던 그 이전의 모든 해가 있었다. 그녀가 태어난 1948년도 있었고, 본문이 시작되기 전 서문과도 같은 그 이전의 모든 세월이 있었다."


우연한 만남이 사건이 되어 인식의 틀에 변화가 생기면 우리는 새로운 틀에 맞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삶의 퍼즐을 다시 맞춘다. 그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태어남’일까.


"기억에 저장된 것은 일부러 기억해 낸 것과는 아주 다르다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다."


삶은 어쩌면 의도와는 상관없이 각인되어 환영처럼 나타나는 기억을 쫓고 쫓는 숨바꼭질 놀이가 아닐까. 수바시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며 가우리를 자신의 터전으로 데리고 가서 아이를 낳게 하고 아이를 기르는 것을 돕는다. 돕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아버지가 된다.  가우리와 수바시에게 있어서 서로는 온전한 하나의 사람일 수 없다. 서로에게 각인되어 있는 우다얀에 대한 기억의 흔적에 의해 수바시와 가우리는 개별적이며 고유한 존재일 수 없다. 수바시와 가우리는 벨라(우다얀과 가우리의 아이)를 통해 우다얀과 이어진 실타래를 풀어내려고 했던 것일까. 죽은 사람은 좋았던 기억만을 증폭시키는 존재이기에 살아있는 사람이 절대 채울 수 없으므로...


"가우리의 정신은 자신을 구해냈다. 똑바로 설 수 있게 했다. 자신이 나아갈 길을 냈다. 떠날 수 있게 자신을 준비시켰다."


가우리의 떠남은 아픔과 고통을 넘어 수바시, 가우리, 그리고 벨라의 두 번째 태어남으로 이어진다.


"고립은 자체적인 형태의 교제를 제공했다. 방의 믿음직한 고요, 저녁의 변함없는 정적, 자신이 노력한 만큼 얻게 될 것이며, 어떤 방해도, 어떤 뜻밖의 일도 없을 것이라는 약속 등이 친구가 되었다. 그 친구들은 날마다 하루가 끝날 무렵에 그녀를 반겨 맞았으며, 밤이면 그녀 곁에 조용히 누웠다. 그녀는 그 상태를 극복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상태에 의존하게 되었고, 이제는 그 상태에서 사람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갔는데, 두 번의 결혼 생활을 하면서 경험했던 관계보다 더 만족스럽고 오래갔다."


관계에 지쳐갈 때 고립만 한 교제가 있을까. 고립의 밤이 새로운 태어남으로 이끄는 것이 아닐까.


"엄마의 부재는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했다. 그 모든 복잡성과 미묘한 차이는 수년 동안 공부한 후에야 비로소 나타난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도 외국의 이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결코 온전히 이해되지는 않는다. …만약 엄마가 그녀 앞에 나타나는 날이 온다면, 벨라가 이 지상의 어떤 언어든 선택해서 말할 수 있다 해도 말할 게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아니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녀는 엄마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다. 벨라의 삶의 모든 게 엄마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나는 나다, 벨라는 중얼거리곤 한다. 나는 내 방식으로 산다, 엄마 때문에."


벨라가 엄마 가우리의 부재로 인해 잃은 것과 얻은 것은 무엇일까. 자식을 보며 하루하루 자신을 잃어가는 엄마와 자신을 마주하는 거울을 회피하지 않는 엄마, 자신에 대한 죄책감과 자식에 대한 죄책감 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의 사유를 의심하지 않는 삶, 속지 않으려 방황하는 삶, 알면서도 속을 수밖에 없는 삶, 평안한 삶을 위해 속아주는 삶 등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있다. 어차피 선택의 문제가 아닐까. 벨라는 엄마와의 얽힌 실타래를 자신의 딸 메그나에게 물려주지 않는다. 모든 관계는 자신의 사유의 지층에서 새롭게 형성해 가는 것일 뿐이다. 비뚤어진 권력의 남용으로 얼룩진 한 시대를 각자의 방식으로 헤쳐나가며 자신의 고유한 길을 찾아가는 모습이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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