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유진
농경 생활을 시작하고 한 곳에 정착하기 전까지, 인류가 세계를 누비는 유목 생활은 낯선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한 곳에 자리 잡게 되고, 도시를 만들고, 익숙한 곳에서 익숙한 음식을 먹으며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며 생활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건 유목 생활에 맞게 오랜 시간 동안 진화해 왔을 인류의 본성에 반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최초의 파종으로부터도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비행기가 날고, 온 세계가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공간의 제약이 그 어느 때보다 없어진 지금, 다시금 유목 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방향인 것도 같습니다.
현대인의 유목 생활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직장일 겁니다. 우리가 먹고 잠자고 입는 한 경제적인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직장에 메여있는 한, 우리에게 공간적 자유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온 세상이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있는 지금, 우리가 일을 하기 위해 일터에 갈 필요가 있을까요.
디지털 노마드는 디지털 세상에 맞게 진화한 새로운 유목민입니다. 노트북만 있으면 원격으로 대부분의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직장에 머물러 일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일 할 장소의 자유를, 생활공간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들은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며 업무를 보기도 하고,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듯 생활하며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노마드 라이프의 장점은 분명합니다. 직장을 오가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고, 보다 효율적으로 시간을 관리할 수 있습니다. 직장 근처에 살 필요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비싼 월세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1년 내내 날씨가 좋은 곳을 찾아다닐 수도 있습니다.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생길 수 있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제약이 사라지는 셈이죠.
노마드 생활은 미니멀 라이프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잦은 이동을 위해서는 몸을 가볍게 할 필요가 있고, 이는 정말 내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물질과 소비로부터의 자유는 진정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고, 내 삶의 주권을 내게로 가져올 수 있도록 합니다. 소비와 물질에 매몰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정말 필요한 생활 방식인 것 같기도 합니다.
아직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고 낯선 개념이지만 많은 선발주자들이 노마드 생활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고 있습니다. 얼굴을 맞대고 일을 하지 않아서 생길 수 있는 문제들을 완화할 수 있도록 많은 협업 프로그램들이 개발되고 있고, 원격 근무 제도를 시행하는 회사들은 그 노하우를 차곡차곡 쌓고 있습니다. 천천히, 그렇지만 분명히 세계는 변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듯, 좋아 보이는 이면에는 고민과 문제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얼마 전, 20년 넘게 원격 근무를 지원했던 IBM에서 돌연 모든 직원들에게 회사로 돌아올 것을 통보했습니다. 자주 얼굴을 마주 보고 토론하면서 시너지를 내기를 바라는 것이 사측의 입장입니다. 주어진 대부분의 일은 물론 집이나 해변에서, 호텔이나 카페에서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연한 만남과 네트워킹 속에서 창조적인 발상이 생길 수 있다는 것 또한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노마드 라이프가 일상과 물질적인 삶에 지친 사람들의 일시적인 유행이 될지, 아니면 통신 기기의 발달로 인한 인류의 새로운 생활 방식이 될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입니다.